작성일 : 12-01-07 15:27
   <해외동포회의보고서>에서 <소신 있는 개량주의자가 되겠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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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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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포회의보고서


6.29선언이 나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교포사회에서 해야할 일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래서 나는 ‘이제 뭘 하는 게 좋을까’하고 생각하다가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통일문제를 꼭 다루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전에 문익환목사님이 미국의 교포들을 향해 ‘해외동포들이 남북한의 중간에 서서 지렛대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계속 마음 속에 담고 있었다가 마침 6.29 선언으로 통일운동에 주력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셈이다.

우선 나는 친한인사와 친북한 인사를 가리지 않고 통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북미주 지역의 모든 인사들이 참여하는 해외동포회의를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몇 차례 준비 모임을 거친 뒤 87년 11월 19일 뉴욕주 불빌에 있는 포레스트힐 수양관에서 ‘해외동포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미국, 캐나다, 독일 등지에서 온 1백여명의 교포들이 참석했는데, 주요인사만 봐도 임창영 전 주미대사(북한에 몇차례 다녀온 적이 있고 김일성주석과도 친분이 있었던 친북인사), 이승만 목사, 김동수 박사 등의 인사들과 손명걸, 민통연합 (북한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인사 등이 참석했다.

그리고 2박 3일간 ‘앞으로 해외동포들이 통일운동을 위해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한 뒤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는 ‘해외동포회의 보고서’라는 문건을 채택했다.

말하자면 북미주의 통일문제에 관심있는 거의 모든 인사들이 다 모여서 통일문제에 대해 회의를 한 뒤 각각의 입장을 한 데 모아 하나의 문서로 통과시킨 것이다.

문서의 기초작성은 내가 했는데, 남북 양쪽 경향의 인사들이 모두 참석했던 회의의 결과물인 만큼 이 보고서는 남북한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정하고 타당성 있는, 실현가능한 제3의 목소리라는 평을 들었다.

해외동포회의보고서는 크게 ‘통일을 다루는 우리의 자세’, ‘남북통일 방안에 대해서’, ‘반핵,군축,미군철수문제’,‘남북대화에 대하여’, ‘해외동포북한방문문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된 내용은 ‘해외동포들이 분단선상에 서서 지렛대역할을 해야 하며, 그래서 남과북을 향해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공정한 제삼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보고서는 나중에 국내 통일운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엔 남북한의 유엔가입 문제가 이슈가 되었을 때인데, 남북한의 주장을 절충하는 제3의 안을 제시했다.

당시 유엔가입에 대해서 남한은 동시가입을 주장하고 있었고, 북한은 연방제 통일을 한뒤 단일국가로 가입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었는데, 해동보고서에서 이 이 두가지 안을 절충한 새로운 대안인 1국가 동시가입이라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말하자면 형식상으로는 1국이지만 내용상으로는 2개의 국가가 함께 가입을 해서 의견이 갈릴때는 기권을 하고 의견이 모아질 때는 찬성, 같이 반대할때는 반대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나중에 문익환목사님께서 이 해동보고서를 읽으시고 높이 평가를 하셨는데, 이런 까닭에서인지 나중에 북한이 해동보고서의 내용처럼 남북한 유엔가입을 ‘1국가 동시가입안’으로 수정하게 된다.

아마도 문익환 목사님이 북한에 가셨을 때 김일성주석에게 이 보고서를 보여주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남북한의 관계가 늘상 그렇듯이 이것이 빌미가 되어 남한정부는 오히려 해동보고서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단순한 반대에서 한걸음 나아가, 김일성주석이 해동보고서의 내용과 같은 주장을 하고 나서자 나중에는 해동보고서의 주장이 굉장히 불온하고 잘못된 주장인 것처럼 남한 사회에서 인식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해동보고서에서 제시한 통일방안이 상당히 괜찮았는데도 불구하고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무척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나는 해외동포회의를 하면서 ‘남북한이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서로 생각이 다르다 해도 하나의 의견을 모아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운동은 안된다’고 말하지 마시오


해외동포회의가 끝나고 나자 한국의 상황은 87년 대통령선거 국면을 맞게 된다. 87년 6.29선언으로 김대중씨가 복권된 뒤 김영삼, 김대중씨가 갈라져서 각각 대통령출마를 선언함에 따라 한국의 운동권은 ‘후보단일화론’, ‘비판적지지론’, ‘독자후보론’ 등 3파로 나뉘어 격렬한 대립을 보였다.

나는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세 정파가 이전투구를 벌이는 현장에 휘말리지는 않았지만, 미국 교포사회도 ‘독자후보론’을 제외한 ‘비판적지지론’과 ‘후보단일화론’을 둘러싼 입장차이로 반목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났다.

나는 그당시 ‘후보단일화론’에 서 있었다. 김영삼씨 지지를 전제로 한 ‘후보단일화’는 아니었고, 두 사람 가운데 누구건 대통령 후보는 한 사람으로 단일화되어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그리고 시민운동,사회운동이 가급적이면 정당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갖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보단일화가 사실상 불가능해지고 양 김씨가 각각 선거전에 뛰어든 뒤에는 다시 김대중씨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나는 이전에 김대중씨와 두번의 인연을 갖고 있다. 한번은 대학졸업 직후인 71년 대통령선거 때 공명선거감시단을 조직화하는 작업을 통해 사실상 김대중 후보 지지운동을 폈었다.

미국에 온 뒤인 85년에도 김대중선생 귀국환송 준비위원회 사무국장 일을 한 적이 있다. 그당시 김대중씨는 미국에 와서 워싱턴 D.C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86년경 귀국을 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김대중씨가 귀국을 하면 한국에서 탄압을 가할 위험성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김대중씨로서는 사지(死地)로 가는 셈이었다. 따라서 교포사회에서는 김대중씨가 한국에 가서 큰 문제를 겪지 않고 어려움 없이 지내도록 하려면 미국에서 귀국환송행사를 크게 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뉴욕의 메디슨스퀘어 가든에서 교포들이 모여서 김대중선생 귀국환송대회를 개최키로 결정을 내렸는데, 내가 그 작업을 책임지는 사무국장을 맡은 것이다. 내게 그 일을 제안하신 분은 이종인 장로셨는데, 그 분은 김대중씨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나는 그당시 정치를 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김대중씨를 돕는 것이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선히 그 제안을 수락하고 환송행사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3개월동안 그야말로 죽어라고 일을 해서 행사를 치렀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과로해 쓰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행사는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미국교포 3천2백명이 참석했다. 그 당시 이런 저런 시위에 참여하는 교포들의 수가 많아야 수십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인원동원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87년말 내가 귀국을 한다고 하자 김대중씨가 기독교쪽에 ‘서경석 목사가 자기와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이런 인연을 갖고 있음에도 내가 그당시 처음에 후보단일화론을 지지한 것은 야권의 분열, 나아가 재야운동권의 분열이 결국은 많은 희생을 치러내고 쟁취한 민주화의 결실을 잃게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양 김씨는 각각 대권도전에 나섰고, 결국 민정당 노태우후보 당선이라는 뼈아픈 결과를 우리 국민들에게 가져다 주고 말았다.

87년 12월 17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내의 여러 지인들이 대통령 선거 전에 귀국해서 이런 저런 일들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해왔지만 나는 대통령선거 시기에 내가 국내에서 할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고 선거가 끝난 뒤인 12월 25일에야 귀국길에 올랐다.

미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뒤에도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대개 외국에서 국내에 돌아올 때는 국내에서 할 일을 미리 정해두고 돌아오지만, 나는 일단 귀국하면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어떤 것이건 간에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귀국해서 할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데 LA에서 연말을 보내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YMCA 강문기총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서목사가 기사연 원장(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을 맡아줘야겠어”

느닷없는 제안을 듣고 내가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그 당시 손학규원장이 외국유학을 떠나면서 기사연원장이 공석이 되었는데, 마땅한 원장후보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사회 결정이 이미 났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1월 2일 한국에 도착해서, 이틀 뒤인 4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원장으로 정식 취임해 내 평생 가장 힘든 시기였던 기사연원장 시절을 열게 된다.

나는 기사연원장취임 요청을 수락하고 난 뒤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일본에서 후배인 김경남목사를 잠시 만났다. 김경남은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유학을 가서 박사가 돼서 교수가 되더라도 절대로 NCC총무가 되지는 말라’며 뼈아픈 말을 했던 후배였다.

김경남의 집에서 하루를 묵으며 나는 경남이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내 생각엔 아무래도 사회주의혁명은 불가능한 것같은데, 너 의견은 어떠냐? 내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성공할 가능성도 없을 것같은데...”

그러자 경남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간곡한 어조로 이렇게 조언했다.

“내 생각도 형님과 같습니다. 그래도 한국에 가서 절대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애들한테는 무조건 ‘내가 아는 게 뭐가 있냐. 니들한테 배워야지’라고 말하고 절대로 나서지 마십시오. 특히 ‘사회주의혁명은 안된다’는 말은 절대로 입에 담지 마십시오”

그말을 들으면서 나도 ‘그러마’고 말했다.

오랫 동안 해외에서 지냈으니 운동의 현장에 있었던 후배들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한국의 각 정파가 벌이는 사구체 논쟁의 폐해를 익히 들었던 바여서 당분간 후배의 말처럼 관망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내 결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사연원장 재임 1년여의 시간 동안을 후배들과의 심각한 마찰로 인해 엄청나게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미국유학 6년간의 회고


미국에서 보낸 6년간의 시간은 나를 열려진 넓은 세상으로 나오게 해준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선 나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민중신학에 얽매어 복음주의를 외면했던 나의 편협한 신앙생활을 교정할 수 있는 신학적인 기초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귀국한 뒤 보수교회와 진보교회로 나뉘어 갈등과 반목을 키워가던 우리나라 교회의 합일을 위해 앞장설 수 있는 신학적인 토양을 갖게 되었다.

또 하나 큰 변화는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내 생각이 바뀐 것이다.

그전에 나는 모든 사물을 ‘사회주의이념’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여과해서 보았다. 그러나 미국시절을 보내면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보통사람들의 합리적인 시각으로 문제 해결의 고리를 찾는 자세로 바뀌어 진 것이다.

이런 생각의 변화가 결국엔 내가 귀국한 뒤 기사연 원장 시절 후배들과 심각한 마찰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었고, 그 뒤 경실련이라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다.

한 마디로 말해 나의 미국 유학 초기 시절은 충격적인 발견과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나는 ‘발전된 자본주의의 엄청난 위력’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한국의 엑셀승용차가 당당히 미국시장에 상륙하는 것을 보면서, 북한과 중국, 그리고 많은 사회주의국가들의 사회적 모순을 알게 되면서, 내가 한국에서 갖고 있었던 생각들이 얼마나 이념의 틀 속에 편협한 것인가를 절감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어두운 뒷골목에서 우물안 개구리로 살아가지 않겠다. 이제는 밝고 넓은 개명천지에 나와 많은 보통사람들과 대기를 호흡하면서 열려진 가슴으로 살아가겠다”

이런 깨달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보낸 6년의 시간 동안 나는 심한 죄의식과 채무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고난의 현장’, ‘투쟁의 현장’에서 벗어나 나혼자 뉴욕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죄의식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서 두 가지 일을 하지 않았다.

첫 째, ‘박사 학위’를 받지 않았다. 나는 유학을 떠날 때 박사학위를 받지 않고 돌아와서 다시 민주화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미국 6년 동안 이결심을 지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박사학위에 대해 그렇게까지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왕에 공부를 하러 갔던 것인데, 국내에서 들려 오는 여러 소식들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진득하게 공부에 전념했더라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땄다면 귀국한 뒤 신학교수가 될 기회가 많았을 것이고, 기사연 원장 시절과 같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회운동의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박사학위를 따지 않겠다’는 결심이 그래도 내가 평생을 사회운동에 바칠 수 있게 만든 귀중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같다.

또 하나 나는 미국시절 동안 ‘놀러가는 일’을 하지 않았다.

6년 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몇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는 ‘나이아가라폭포’조차 구경하지 않았고, ‘그랜드케년계곡’도 가지 않았다.

나는 투쟁의 현장을 떠나 있는 내가 이런 곳을 놀러 다닌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솔직히 말하면 ‘놀러다녀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교포 민주화운동으로 바빴다.

미국으로 갈 당시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다.

‘꼭 미국까지 가서 신학공부를 해야 하나. 여기 남아 다른 선후배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는 게 더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정치상황이 이렇게 나쁠 때 나혼자 미국으로 가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6년의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오랜 동안 ‘변혁론’에 빠져 우리사회를 바라보고 그런 사고의 틀 속에서 사회운동을 펴나갔을 것같다.

아마도 ‘경실련 운동’과 같은 새로운 운동은 꿈조차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 시절은 나를 ‘사회주의혁명가’에서 ‘합리적인 시민운동가’로 바뀌게 만들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



새벽까지 계속된 아내와의 논쟁


미국 유학 시절은 나로 하여금 여러 면에서 눈을 뜨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는데, 이 가운데는 여성문제도 포함된다. 나는 미국에서 보낸 6년 동안 내 처에게 철저하게 페미니즘 교육을 받았다.

연애 시절 내 처는 아주 착하고 현모양처 타입의 여성이었다. 내가 기독청년운동을 하느라 연애 시절에 약속시간에 늦거나 이런 저런 연락 심부름을 많이 시켰는데도 아내는 별로 싫은 내색 한번 내비치지 않고 내 말을 잘 들어 줄 정도로 순종형의 여자였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 여성사회학 공부를 하면서 아내는 그야말로 여성투사로 변해 버렸다. 적어도 내 눈에 비치는 아내의 모습은 그랬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부장제적 문화 위에서 덕을 보면서 살아가던 나의 행복한 남편시절도 사실상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아내는 여성사회학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미국의 급진주의적 여성운동론에 깊이 빠져 든 뒤부터 가부장제적 사회에 대한 반발과 적개심을 자주 토로하곤 했었는데, 아내의 눈에 보이는 가부장제적인 문화의식의 본보기가 바로 나였다.

아내는 내가 처신하는 모든 행동이나 사고방식, 생각 등을 보면서 얼마나 이 사회가 가부장제적인가를 느꼈고, 당연히 내가 하는 처신 하나하나가 모두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만난 격이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살아 가고 있는데, 그리고 내 나이의 남자치고는 그래도 상당히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내가 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불만을 털어 놓고 비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팽팽하게 맞서다 보니 가정생활이 대립과 투쟁의 과정으로 변해 버렸다.

특히 미국에 건너간지 1년 정도 지나고나서 두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오면서 아내는 집안일에, 아르바이트, 아이들 양육부담까지 겹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어려운 신학공부에 아르바이트에, 민주화운동까지 하려다 보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러다 보니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투는 일도 많았다. 그 때 우리는 뉴저지에 살면서 뉴욕의 교회에 다녔는데, 자동차가 한 대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뉴욕 민주화운동을 이끄느라 주중엔 뉴욕에서 살다시피했는데, 당연히 차를 가져 가야 했다. 하지만 아내도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수퍼에 가서 식품도 사려면 차가 필요했다.

사소한 문제인 것같지만, 이런 문제도 그 당시엔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한번은 내가 뉴욕으로 차를 가져 가는 바람에 아이들이 아침 통학버스를 놓쳐 14불을 내고 택시를 타고 등교를 하기도 했다. 당연히 뉴욕에서 돌아온 뒤 나는 아내의 비판을 들어야 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아내는 같이 공부하는 처지인만큼 가사노동이나 육아도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고 했지만, 밥짓는 법도 제대로 모르던 내가 갑자기 가사노동을 아내와 똑같이 분담한다는 것은 너무나 부담이었다.

이래 저래 다툼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대체로 내가 아내에게 밀리는 처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하루밤을 새면서 여성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남녀의 역할이 다느냐, 같느냐’에 관한 문제였는데, 나나 내 처나 지금까지 공부했던 모든 사회과학 지식을 총동원해 각각 자기 주장이 옳음을 주장했다.

나는 남녀의 역할이 다르다고 주장했고, 처는 가부장제적 질서 속에서 여자들이 그렇게 길들여 졌을 뿐 다를 게 없다고 맞섰다.

마지막엔 결국 내가 ‘당신 말이 옳다’며 두손을 들고 말았다. 그때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나는 항복선언을 하면서 불평등한 사회현실과 남성이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 이득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 스스로도 이런 불평등한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낀다고 털어 놓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 부부는 ‘무슨 남자가 이래, 무슨 여자가 이래’하는 식의 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튼 이 토론이 있은 뒤 나는 처에게 가사노동을 분담하기로 약속했고, 일주일에 3번의 식사당번을 내가 맡았다.

밥 짓고,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것은 기본이고, 김치담그고 아이들 간식 만드는 일도 했다.

하지만 뉴욕에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자연 약속을 못지킬 때도 많았는데, 그런 날엔 처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나로서도 스트레스가 쌓일 때가 많았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모처럼 시간여유가 생겨 아내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내가 뭐 도와주면 돼?”하고 묻자 아내가 벌컥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언제 당신에게 ‘뭐 도와주면 돼?’하고 물으면서 집안 일 하는 거 봤어요? 두 사람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니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누가 누구를 도와준다는 거예요”

나로서는 모처럼 아내에게 잃었던 점수를 만회해 보려고 선심을 썼던 것인데, 이처럼 무참하게 욕을 먹고 나니 머쓱해졌고 자연 스트레스가 쌓였다.

식사당번 역할을 제대로 하려고 ‘미역국 끓이는 법’을 물었다가 ‘나도 혼자서 배워서 했는데, 당신은 왜 혼자서 못해요. 관심이 있으면 옆에서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면 되잖아요’라고 아내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어찌되었건 ‘남편의 가사노동 분담’에 대해서는 확실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가사노동을 분담하기로 결정한 뒤에도 나는 뉴욕을 왔다갔다 하다 보니 번번히 약속을 어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내의 거센 항의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아내도 심한 편두통에 시달리는 데다 박사학위 과정도 자꾸 미뤄지게 되어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처와 협정을 맺었다.

‘내가 87년까지 민주화운동, 사회운동을 하는 것을 양해해주면, 그 이후부터는 내가 혼자서 애들을 데리고 귀국해서 교육을 시키겠다. 그러니 그 뒤 당신 혼자 남아서 박사학위를 끝내라’는 게 협정의 내용이다.

그리고 결국 87년 12월 나 혼자 애들을 데리고 귀국했고, 아내는 2년 동안 혼자 남아서 박사학위를 끝냈다.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귀국한다는 결심은 그 때 나로서는 상당한 결단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정말로 아이들을 혼자서 키울 결심을 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한국에 들어오자 마자 나는 또 다시 기사연이다 경실련이다 하며 눈코뜰새 없이 바빠져 결국 부모님이 아이들을 다 키워주셨지만 말이다.

나는 미국 시절에 겪은 이처럼 혹독한 페미니즘 교육 덕분에 요즘에도 밤에 야식을 만들거나 쓰레기를 치우는 일 등 소소한 부엌일을 거리낌 없이 하는 편이다.

아들인 기준이도 설겆이를 하거나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는 일을 자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약 우리 부부가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이런 변화가 쉽게 오지는 않았을 것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엔 무척 괴로웠지만, 아내의 혹독한 페미니즘 교육 덕분에 나는 쉰살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성문제에 있어서만은 꽤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실천도 하는 페미니스트가 된 셈이다.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돌이켜 보면 기사연 원장으로 일했던 1년간은 내 평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나는 기사연 원장으로 취임할 당시부터 실무자들에게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 기독교운동의 상황은 어른들도 젊은 실무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이었는데, 우선 나의 원장 취임은 젊은 실무자들의 충분한 동의 없이 이뤄졌다. 말하자면 해외파가 낙하산식으로 내려와 원장으로 취임한 셈이었다.

또 하나는 내가 너무 온건하지 않느냐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내가 미국에서 윤한봉 그룹과 노선갈등을 보였던 것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서경석류의 운동은 개량주의다’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그밖에도 그 당시 기독운동의 두 경향 가운데 내가 신보수파인 아이덴터티파와 가깝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 당시 기독운동 진영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그룹과 사회과학적 인식에 기초한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그룹으로 분열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전자는 새문안교회 출신들이 중심이었고 후자는 제일교회 출신들이 중심이었는데, 나는 새문안교회 출신들과 인간관계가 깊다 보니 자연 아이덴터티 그룹으로 분류된 것이다.

딱히 이런 이유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의 살벌한 운동권의 상황을 감안하면 나같은 해외파가 운동권의 대표적인 연구단체의 원장에 취임한다는 것은 논란거리가 될만한 일이었다.

당시 운동권의 상황은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을 찾아 보기 어려웠고, 선배들이 오히려 후배들의 눈치를 봐야할 상황이었다. 만약 내가 1~2년 쯤 먼저 귀국했다면 그 당시 운동권용어로 ‘하방(下方)’해서 노동현장이나 농촌에서 브루조아 잔재를 다 씻어내고 나서야 운동권에 들어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보다 2년쯤 먼저 귀국한 박종렬목사(길지 현발행인)의 경우 미국 버클리대학의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도 한국에 돌아온 뒤 상당 기간 노동현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내가 돌아온 88년엔 운동권이 87년 대선때 ‘비판적지지’, ‘후보단일화’, ‘독자후보론’으로 나눠졌던 후유증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때여서 나는 비교적 후배들의 닥달을 덜 받고 기사연 원장으로 취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사연은 그 당시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상당히 권위있는 기관이었다. 당시 기사연에서는 기사연리포트라는 책을 발간하고 있었는데, 이 리포트는 당시 일반 학생운동권에서조차 지침서로 삼고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기사연은 만들어진 지 10년 되었는데, 나 이전에 원장은 조순경목사, 이우정교수, 손학규교수가 맡았고 손교수가 박사학위를 마치기 위해 영국으로 가는 바람에 내가 원장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귀국하기 직전 일본에서 김경남에게 들었던 조언대로 원장 취임 뒤 한 동안은 실무자들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며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왜냐하면 나는 6년이나 외국에 나가 있었던 해외파였기 때문에 국내의 운동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었고, 내가 어떤 주장을 한다고 그것이 먹혀들어갈 분위기도 아니었다. 사실상 발언권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6개월 쯤 지나고 나니까 상황이 좀 심각해졌다.

88년 우리 사회의 상황은 ‘통일운동의 원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통일운동이 봇물 터지듯이 활성화되던 때였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통일대장정, 국토종단순례, 범민족대회 등이 거론되거나 시도되고 있었는데, 기사연 리포트는 이런 현상을 두고 ‘민족운동이 확대되어 가고 있다’고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운동권이 변화된 상황에 신축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거꾸로 갈수록 급진화되어 운동권과 일반 국민들 사이에 괴리현상이 생기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운동권이 주사파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는 것도 내겐 충격이었다. 실제로 그 당시 주사파쪽에서 낸 문건 가운데는 북한방송을 그대로 녹취해서 만든 것도 버젓이 들어 있었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내 고민은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연구단체의 원장이라고 하면 지식인 집단의 책임을 지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내가 실무자들의 비판이 두려워 눈치나 보고 침묵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나이 사십을 넘긴 내가 후배들이 두려워 소신조차 말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양심적인 지식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가 나를 붙잡았다. 내가 운동권의 잘못을 지적하면 곧바로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게 뻔했던 터라 솔직히 운동권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설 자신이 선뜻 서지 않았다.

그때 나한테 격려가 된 사람이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고 있던 유근일씨였다. 그때 유근일씨는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소신있게 운동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에게 정신적으로 큰 격려가 되었다.

또 하나는 우리마당이라고 하는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 이근식교수, 양건교수, 박인제, 박재창, 김규칠, 유근일, 이영희교수 등 중도파 지식인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모임이었는데, 박세일, 이각범, 김상철 등 가까운 친구들이 가입해 있었던 까닭에 나도 귀국한 직후부터 멤버가 되었다.

이곳에 나가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 당시 나에게 유일한 정신적인 격려와 위안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지금까지 나는 나이가 젊었기 때문에 어른들을 뒤에서 쫒아가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다른 분들의 등 뒤에 숨어 있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는 내가 앞장서서 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때가 되었다. 설사 내가 내 소신을 펴다가 운동권에서 파문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제는 할말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독교모임이나 집회, 강연에 초청받아 가면 나는 ‘기독교운동은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것이어야지 사회주의이념을 절대화하는 식으로 가면 안된다’고 말했다. 한번은 예장 청년운동 집회에서 이런 요지의 강연을 했더니 청중들의 반응이 싸늘해 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또 한번은 기독교 운동가들이 1백여명 정도 모인 집회에서 그당시 열기를 더해가던 ‘북한알기운동’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운동권에서는 홍동근목사의 북한방문기인 ‘미완의 귀향일기’를 보급하는 운동을 펴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북한의 실상을 왜곡되게 인식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홍목사는 매우 진지한 분이지만, 어머님이 북한에 계시기 때문에 북한을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없는 조건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기독운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재 운동권에서 주도하고 있는 북한알기운동은 북한의 실상을 잘 모르고 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분들도 북한의 실상을 알게 될테니 그때까지는 북한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내가 말을 마치자 강연장에 침묵이 쫙 흘렀다. 그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내가 엄청나게 반동적인 발언을 했던 셈이다.

나는 운동권을 거의 장악하다시피했던 이념인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거침 없이 비판했다. 주체사상의 긍정적인 부분은 인정해야 하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물론 그런 내 생각을 기사연의 연구간사들이 동조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연구원안에서 나와 실무자들간의 대립이 그칠 날이 없었다.

내가 기사연리포트에 ‘페레스트로이카’를 소개하자고 하면 실무자들이 반대했고, 실무자들이 주체사상을 지지 일변도의 목소리로 실으려고 하면 내가 못하게 했다.

나는 미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운동권의 분위기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후배들과의 마찰은 더욱 심해졌다.

또한 나는 당시 운동권의 상황을 조사, 분석해서 그 결과를 이사회에 상세하게 전달하기도 했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때 기사연에는 박형규, 김관석, 강문규, 김용복, 김상근, 김찬국, 이우정, 이효재, 서광석 등 한국교회운동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이사로 계셨지만, 그런 내 보고를 듣고도 이사회에서는 별로 심각하게 반응하는 것같지 않았다.

결국 계속해서 내 목소리만 돌출되어 나왔고, 주사파가 주류이던 기사연 실무자들과의 관계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 기사연 실무자들의 ‘나를 내쫒기 위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서경석을 내쫒자


지금 생각해 봐도 사실 참 고통스럽고 힘겨운 과정이었다. 지나간 70년대 해군중위의 신분으로 민청학련과 같은 반정부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결심하는 것보다 기사연 원장의 신분으로 내가 지금까지 몸담아왔던 운동권에 대해서 내 소신을 펴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다.

그나마도 그때 나로서는 운동권과 정면으로 맞서서 소신을 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합리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기여하는 정도의 역할만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한번은 너무 마음이 답답해서 평소에 가깝게 생각했던 후배 한 사람을 불러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사회주의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길은 스웨덴과 같은 민주복지국가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운동권에서는 자꾸 사회주의혁명을 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걱정이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자 그 후배는 드러내 놓고 반발했다.

“저는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원장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빌미가 되었다. 그동안에는 나를 비판하는 진영에서 ‘서경석 목사가 너무 온건하지 않느냐’고 막연하게 생각해 오다가 이것을 빌미로 ‘서경석이 개량주의자’라는 확실한 증거를 포착한 셈이었다.

특히 그 즈음 기독교운동 진영에서는 87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입장이 갈려 분열되었던 단체들이 1년 정도의 기간을 거치면서 ‘기독교사회운동연합’이라는 통합 조직을 만들게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운동을 재정비 해서 기독교사회운동 진영의 지도 아래 모든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그 일차적인 정비대상이 바로 나였다.

내가 훗날 들은 바로는 나를 기사연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대책소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나를 내쫓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까지 짰다고 한다.

기사연은 매년 1월초가 되면 사회운동의 각 분야에 있는 사람을 초대해서 향후 1년간 기사연이 어떤 문제를 연구과제로 삼으면 좋을 지를 함께 논의하고 연구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88년 초에도 그런 자리가 있었고 89년 1월 11일에도 그런 자리가 만들어졌었는데, 말하자면 그 자리가 나를 내쫒기 위한 포문을 여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는 기독교 운동권 뿐만 아니라 일반 운동권의 대표들도 대부분 모였는데, 각 분야 대표들의 발표가 끝나자 마지막에 기독청년협의회(EYC:과거에 내가 가장 헌신적으로 만들었던 조직)의 후배가 일어나더니 ‘자신은 연구과제를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성명서 비슷한 것을 낭독했다.

“지난 1년 동안 기사연은 민족민주운동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했다. 그 원인은 서경석 원장서리에게 있다. 그러니까 서원장은 사퇴해야 한다. 만약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리는 서원장이 사퇴할 때까지 투쟁을 하겠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같다.

뒤이어 몇몇 단체가 연구과제를 발표했지만 참석자들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고, 회의를 서둘러 끝마쳤다. 한마디로 그날의 프로그램은 완전히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고, 당연히 기사연이 발칵 뒤집혔다.

다음날부터 기사연 실무자들 안에서도 격렬한 토론이 진행되었고, 나를 지지한 실무자가 5명, 반대하는 실무자가 12명으로 갈라져서 본격적인 분규가 시작되었다.

‘원장 사퇴’를 주장하는 실무자들은 처음에는 사퇴하는 이유를 ‘내 관점이 잘못돼서 그렇다’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리더쉽 부족’을 거론했다.

나는 실무자들의 그런 주장을 수용하기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너무나 황당하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 평생에 후배들로부터 이처럼 배척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나로서는 내가 원장에서 쫒겨나야할 정도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나는 대학을 졸업한 이래로 군대생활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운동 이외에 다른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20여년간 오로지 기독교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해 왔고 그 과정에서 감옥을 세차례나 드나들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매도당하며 원장에서 쫒겨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윤리적으로 목사의 신분에 합당하지 못한 결함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는가. 생각이 온건하다는 이유로 원장 자리에서 쫒겨 나야 한다면 도대체 누가 소신을 갖고 기독운동을 할 수 있겠는가’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에 너무나 허탈했고, 한편으로는 나의 부족함이 이런 사태까지 빚게 되었다는 생각에 무척 참담했다.

나를 지지하는 실무자들이 ‘내가 원장자격이 없어서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문건을 만들자 심지어 반대하는 실무자들이 중심이 되어 나의 결점과 잘못을 모은 책을 만들어 이것을 운동권의 여기저기에 배포하는 일까지 일어 났다.

나도 그책을 한권 구해서 읽었는데, 한마디로 그 책에 담겨 있는 내 모습은 ‘악마 중의 악마’였다.

내가 한번은 집안형편이 어려운 실무자에게 명절에 부모님께 가져다 드리라며 구두표를 한장 건네준 적이 있는데, 이 행동이 이 책에서는 원장이 실무자를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뇌물을 먹였다는 식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책에 적혀 있는 나는 아집과 독선, 권위주의에 빠져 실무자들을 사사건건 괴롭히는 구제불능의 사람이었다.

그 책의 한구절 한구절이 내게는 살을 에이는 듯한 고통이었다. 감옥에서 육체적으로 겪은 고통은 이때의 고통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사들 가운데 강문규 YMCA 사무총장, 김용복 박사 같은 분은 확고하게 내편에 서 있었는데, 내가 너무나 괴로워서 ‘사퇴를 해야 겠다’고 말하자 ‘절대로 사퇴하면 안된다’며 나를 말렸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황당한 마음으로 그냥 몇달을 보내는 동안 기사연의 스트라이크도 점점 극렬해져 갔다. 실무자들은 아침 9시에 출근하면 모두 모여서 주먹으로 벽을 치면서 ‘산자여 따르라’라는 노래를 불렀고, 오후 다섯시가 되면 똑같은 행동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실무자들은 아예 내게는 이야기를 건네지도 않았고, 내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실무자들은 나를 ‘에이즈’라고 불렀다. 내가 나타나면 ‘에이즈 왔다’며 수근대곤 했다.

그러나 스트라이크를 하는 동안 기사연 일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봉급은 꼬박꼬박 받아갔기 때문에 기사연의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한때 실무자들과 타협하고 극한적인 대치를 풀려는 마음을 가져본 적도 있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형편인데도 이사회에서는 해결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한 마디로 원장과 실무자 양쪽에 치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상황이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이사회에 대해서도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구원의 외부인사가 원장을 향해서 사퇴하라는 요구를 하는데도 이사회가 원장을 보호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사회의 어른들은 내가 미국에 있을 때 꿈에도 그리던 분들이었고, 기독운동을 하는 과정에서도 하늘처럼 믿고 따랐던 분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돌아와서 보니 그분들은 이제 아무런 힘이 없고 원로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원로란 젊은 사람들이 잘못할 때 결연히 꾸짖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그런 점에서 어른들이 우유부단하게 젊은 실무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왔다. 솔직히 우리사회에 원로가 없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89년 5월 나는 원장직 사표를 냈고 나를 반대했던 실무자들도 모두 사표를 냈다. 기사연도 잠정적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 사건으로 인해서 기사연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그 이후 그 이전의 활동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89년 당시 우리의 운동권의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뼈아픈 경험이 준 교훈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두 번 든다면 한번은 해군중위의 신분으로 민청학련에 연루되어 20년형을 선고받았을 때이고, 또 한번은 바로 기사연 원장을 지냈던 기간이었다.

첫 시련은 내게 육체적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신앙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낭떠러지로 떨어지도록 만든 이때의 시련은 내 인생을 좀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고, 좀더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기사연에서 겪은 시련은 이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이때 나는 한편으로는 내가 기사연 원장으로서 훌륭한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같아 괴로웠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내가 원장을 사퇴해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에 매우 억울해 했다.

나는 그때까지 후배들로부터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후배들의 존경스러운 선배로서 살아왔던 셈인데, 처음으로 후배들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며 무참하게 짓밟히게 되니까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심정이었다.

그랬음에도 나는 나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던 그 후배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마음이 넓거나 아량이 넓어서가 아니었다.

나 또한 과거에 그들과 똑 같은 나쁜 일을 저질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가기 전에 내가 한 선배를 기독교기관의 어느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주동이 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꼭 내가 원해서라기보다 후배들이 선배인 내가 앞장서야 한다고 해서 결국 총대를 매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 선배를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만든 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그 선배가 후배들에 의해 그렇게 내쫒김을 당해야 할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몇몇 사람들의 선동이 마치 그 선배가 그자리에서 물러나면 운동이 잘 풀릴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낳았다. 말하자면 그 선배는 ‘잘 풀리지 않던 그때의 운동권 상황이 만들어낸 희생양’과도 같았다.

때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몇 해전 서경석이 선배 내쫒는 일에 앞장서더니 결국엔 자기도 후배들에게 내쫒김을 당하는구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을 것같다.

하지만 나는 거꾸로 내가 그때 그런 잘못을 저지른 아픔을 갖고 있었던 것에대해 하느님께 감사했다. 나도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던 경험을 갖고 있었기에 내게 돌을 던진 기사연의 젊은 실무자들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내가 앞장서서 내쫒았던 그 선배를 몇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배의 눈빛을 보니 꼭 나를 용서하는 것같지 않았다.. 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내내 풀리지 않는 것같았다.

선배의 이런 모습은 내게 또 다른 아픔을 주었다. 생각할수록 내가 총대를 매었던 것을 후회했다.

나는 이런 기억 때문에 나를 인격적으로 모독한 기사연 후배들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다.

내가 기사연을 그만두고 경실련을 만들고 난 뒤 3년쯤 지났을 때, 기사연에서 나를 비판했던 전직 실무자 한분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그 분은 무척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젊은 시절에 똑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날은 잊어 버리고 앞으로 서로 돕고 지냅시다”

나는 그 분의 손을 꼭 쥐어 주었고, 그는 그뒤 경실련 회원으로 가입했다.



소신 있는 개량주의자가 되겠소


사실 나는 기사연 원장에 취임하면서 기사연을 통해 우리사회의 대안모색 작업을 하려고 했었다.

그 당시 우리의 운동권은 NL, PD, ND로 나뉘어 사회구성체 논쟁이 심화되고 있었고, 이러한 변혁론 가운데 하나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개량주의자’로 낙인찍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개량주의자’로 낙인찍힌다는 것은 종교용어로 말하자면 일종의 ‘파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 종교적 파문이 두려워 교조적인 변혁론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나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현존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보면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졌다.

따라서 나는 변혁론적 사고방식으로 우리사회를 바라보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입장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운동권에서는 개량주의를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지향하지 않고 몇몇 개량적인 조치로 민중들의 혁명적 열기를 희석화시켜 체제의 존립을 꾀하려는 불순한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물론 나는 생각이 좀 달랐다.

나는 ‘개량’이라는 의미가 권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시혜적으로 베푸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세력이 긴 투쟁의 과정 속에서 거둔 값진 결실도 포함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한 사회의 문제를 가능하다면 그 사회에서 허용하는 방식으로 고쳐나가는 개량주의적 방법이 혁명적 방법보다 속도는 더딜 망정 희생이 훨씬 적은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 당시 운동권의 시각은 사회주의 혁명의 신조에 서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이 제 아무리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와 진정한 개량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어도 결국 ‘개량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어 ‘파문’을 하고 마는 풍토였다.

그러나 6.29 이후 변화된 우리나라의 상황은 결코 이러한 이분법을 허용하고 있지 않았다. 우선 한국사회의 경제가 여러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정치적인 민주화도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정권이나 전두환정권 때와는 달리 그 당시 많은 국민들은 이제 우리사회도 합법적인 방법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도 상당히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 당시 우리사회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국민적 합의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5공비리와 광주사건을 철저히 규명하고 확실하게 청산해야 한다’,‘빈부의 양극화는 과감한 분배정책을 통해서 해소시켜야 한다’,‘모든 분야에서 민주주의는 착실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화해와 통일을 향해 확고하게 나아가야 한다’,‘그리고 이러한 모든 진보의 과정은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게임의 룰을 지키면서 이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들이다.

그런데도 운동권에서는 이러한 국민적 합의에 귀기울여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사회주의적 변혁론에 빠져 ‘통일운동이 중요하다느니’ ‘노동운동이 중요하다느니’ 하며 비현실적인 사구체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오랜 민주화투쟁에서 보여준 헌신적인 공로에도 불구하고 운동권을 일반 국민들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때문에 나는 당시 진보 진영의 이론적 길안내 역할을 하던 기사연을 통해 운동권이 변화된 환경 속에서 우리사회의 진보를 이룩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길안내 역할을 하려고 했다.

무조건 부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부수지만, 한편으로는 건설하는 그런 운동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고민이 이제는 운동권 내부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생각은 ‘개량주의’로 낙인찍혀 극심한 비판을 받게 되었고, 결국엔 ‘원장사퇴’, ‘기사연 잠정폐쇄’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악화되고 만 것이다.

89년 5월 어느 날 나는 당시 기사연 이사장이셨던 박형규목사님을 찾아가 기사연의 도장과 열쇠꾸러미를 드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기사연의 젊은 간사들이 나더러 원장자격이 없다고 하는데, 앞으로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스스로 검증해 보겠습니다.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다시 운동을 시작해 그곳에서도 리더쉽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면 나는 영원히 운동을 하지 않고 목회를 하거나 사업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신있는 개량주의자로 살겠습니다”

기사연을 그만둔 뒤 한동안 나는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한 때는 서울대학 앞에 있는 사랑방교회라는 작은 개척교회에서 목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서 개척교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그 사랑방교회에 재정지원을 하고 있던 영락교회의 권사회가 ‘서경석목사는 운동권이어서 안된다’고 반대해 결국 개척교회에서 목회를 하려던 나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전에 몇차례 사랑방교회에 가서 그곳에 나오던 대학생들을 만나본 뒤 목회를 한번 해볼만한 교회라고 생각했었던 나로서는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다.

운동권에서는 ‘개량주의자’라고 비난을 받고, 또 보수교회로부터는 ‘운동권 목사’라고 외면을 받고 보니 참으로 기분이 참담했다.

그러던 중 나는 지금 우리사회에 가장 필요한 사회운동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그 당시 우리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였던 부동산투기를 근절하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을 모아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경제정의실천연합의 모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