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1-07 16:15
   <‘서총장, 잠 잘잤어?’>에서 <나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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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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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총장 잠 잘잤어?


경실련을 하면서 내가 가졌던 중요한 원칙은 ‘함께 일하던 사람을 절대로 짤라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동참하고 참여하는 운동이 되어야지 마음에 맞지 않거나 자꾸 딴 소리를 한다고 누군가를 짤라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시민의 신문을 창간할 때의 일이다. 정책실의 이대영간사가 경실련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신문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심각한 검토를 거쳐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구체적인 기획안을 만들어 상임집행위에 제안했다.

그랬더니 50% 정도의 위원들이 반대 의견을 보였다. 그래서 일단 그안을 철회했다가 다시 연구작업을 거쳐 ‘아무래도 신문을 창간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상집위에 제안을 했다.

이때도 여전히 반대의견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신문을 만들려면 어차피 기업의 광고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자칫 경실련이 기업에 종속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만약 그런 논리라면 한겨레신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만약 한겨레신문이 기업에 종속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창간되지 않았다면 옳은 일이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기업의 광고를 받는다고 반드시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는 반론을 폈다.

그러나 반대의견이 많아 우선 시험호를 내보자는 결정을 내리고 얼마 뒤 시험호를 냈다. 시험호에는 광고를 실을 수 없으므로 이 과정에서 적어도 수천만원의 돈이 들었다.

시험호가 나오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찬성쪽으로 돌아서는 사람이 많아졌다. 하지만 두세명의 위원이 끝까지 반대했는데, 나중에는 집행위원장 한분만 반대를 했다.

그분도 처음에는 모두가 찬성하니까 그냥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려다가 토론 끝무렵에 가서는 고함치듯이 ‘나는 반대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분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도 집행위원장의 의견에 동의한다. 정식창간을 미루자. 내 생각에도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같다”라고 말했고 결국 상집위도 창간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내가 그안을 무산시켜버린 셈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 분이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그러고서는 내게 “서총장 잠 잘잤어?”하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저는 잠을 잘 잤습니다”라고 말했더니 “나는 밤새 한숨도 못잤어”라고 말하면서 “2억원의 약정과 1억원의 현금만 확보한다면 나도 신문창간에 동의하겠다. 그리고 9천9백만원의 현금이 확보되면 내가 1백만원을 내서 1억원을 채우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결국 이분까지 포함해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어 주간 ‘시민의 신문’이 창간되었다. 모두의 동의를 끌어내느라 몇달이 시간이 지났고, 비용도 수천만원이 깨진 셈이다.

내가 이처럼 많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굳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는 만약 그날의 상집위에서 그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문창간을 강행했다면 아마 우리가 그분을 잃어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분이 감정이 상해 경실련을 그만둘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분이 그만두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자칫 사람들이 ‘서경석 총장은 자기와 마음에 안들면 짤라 버린다’고 생각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자연히 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것이고, 결국 경실련의 결속을 약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실무자들이 내 눈치를 보면서 내 의견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지 않게될 위험도 있다.

반면 내가 상임집행장이 찬성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경실련은 엄청나게 결속력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비단 이 사례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경실련을 하면서 의견이 분열되어 그과정에서 감정이 상하거나 반감을 갖고 경실련을 떠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나는 만약 서로의 견해가 아주 다르면 그사람에게 직접 찾아가 그사람 앞에서 부탁하고 호소하는 방법을 통해 동의를 얻어 냈다. 절대로 그사람을 제껴버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상대방이 끝까지 반대하면 아예 당분간 계획을 중단하고 기다렸다. 그런 태도를 보이면 반대하는 사람은 부담을 느끼는 법이고 결국 모두가 찬성하는 일이라면 본인도 찬성으로 견해를 바꾸게 된다. 그러면 나는 그때서야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런 또 다른 예가 이근식교수와 나의 관계다. 이교수는 경실련이 출범할 때 발기선언문을 썼고 나와 양기둥이 되어 경실련을 만들어 나갔던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경실련운동을 하는 동안 나를 가장 견재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물론 이교수가 나를 지지해주고 지원해준 경우도 많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나를 도와주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견재하고 비판하는 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다. 때로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비판하기도 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적도 있다.

이처럼 이교수는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경실련을 이끌어 갈 때 걸리적거리는 장애물로 비춰질 수도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이교수가 경실련의 핵심멤버의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적극 지원했다.

때로는 이교수가 외국에서 지내느라 경실련을 떠나야할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한국에 돌아오면 언제나 다시 핵심적인 자리에 추천해서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물론 이교수도 나에 대한 애정이 지극해서 내가 정치참여문제로 고민할 때 나를 찾아와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좋은 대화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다.

이처럼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내 의견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제끼거나 소외시키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성실성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경실련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말하자면 경실련 안에서 나와 견해차이를 느끼고 때로는 어떤 문제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나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는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런 점은 경실련과 같은 큰 조직을 이끌어 갈 때에는 매우 중요하다. 여러 사람이 모여 견해가 엇갈리고 갈등을 일으킬 때 서로가 인간적인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그런 엇갈림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경실련 실무자의 결혼


경실련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누가 질문한다면 나는 아마 재정문제를 꼽게 될 것같다.

현재 경실련은 한 해 꾸려 나가는 데 드는 비용이 대략 8억원에 달한다. 8억원의 돈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경실련이 우리사회를 위해 펼치고 있는 많은 사업들과 부정하게 벌어들이는 각종 불로소득을 생각하면 사실 그리 큰 돈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 8억원을 마련하지 못해 경실련 활동에 위기감을 느끼기도 한다.

경실련 실무자인 박병옥의 결혼이야기는 나와 실무자들이 이처럼 어려운 재정부족을 어떻게 함께 이겨나갔는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일 될 것이다.

박병옥은 경실련이 출범할 때부터 일해온 나의 후배이자 실무자인데, 원래 운동권 출신이다. 때문에 경실련에서 1년 동안 일하면서 처음에는 변혁론적 사고를 극복하지 못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조직국 간사를 맡았는데, 경실련 출범 때엔 내가 특히 간사들을 몰아 부쳤기 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5년 뒤 박병옥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경실련 실무자로 일하다 보니 그에게 결혼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내가 ‘경실련 일을 하다가 장가갈 자금도 못모은 박병옥이를 장가보내야 하는데, 도움을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내용의 편지를 직접 써서 경실련 주요간부, 후견인, 회원 등 2백명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사방에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해 이렇게 해서 모은 돈이 1천5백만원이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편지까지 써서 결혼자금을 모금한 이유는 물론 열심히 일했던 실무자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전부터 그에게 “너 결혼하는 건 결혼마라. 내가 책임질께”하며 결혼자금 걱정일랑 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는 말을 해왔었다. 그리고 실제로 박병옥이 결혼할 때 그것을 지킨 셈이다.

박병옥은 지금 경실련 정책실장을 맡고 있는데, 자신의 장기적인 꿈을 경실련 사무총장이라고 말할 만큼 경실련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

사실 수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 시민단체가 여러 사업들을 진행시키려면 늘 재정곤란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물론 회원들의 회비로 단체를 꾸려나갈 수 있다면 바람직하겠지만, 우리나라처럼 한달 회비 1천원을 내려고 해도 지로용지를 들고 은행에 나가야 하는 현실에서는 이도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큰 사업을 벌일 때엔 기업의 협찬을 받기도 하는데, 이러면 또 언론에서 난리를 친다. 한번은 경실련에서 기업에서 협찬을 받아 환경컨서트를 연 적이 있는데, 어떤 신문에서 이를 두고 ‘왜 경실련은 전교조처럼 백프로 회원들의 회비로 꾸려 나가지 못하느냐’며 맹렬하게 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사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무척 화가 났었다. 경실련이 그 컨서트를 통해 수익을 본 것도 아니라 그야말로 환경캠페인을 벌였던 것 뿐이었고, 부족한 재정을 기업에서 협찬을 받되 경실련이 독자적으로 개최했던 행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시민운동단체의 재정이 가장 이상적이려면 회원회비가 3분의 1, 사업수익이 3분의 1, 특별 헌금이 3분의 1 정도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경실련은 재정의 비중에서 회비수입이 20% 정도를 차지한다. 전체 회원이 1만 5천명 정도인데, 이 가운데 30% 정도가 회비를 낸다. 처음에는 회비수입이 전체수입의 1/3을 차지했지만, 경실련의 규모가 커지면서 비중이 20%로 낮아 졌다.

때문에 나머지 재정을 메꾸기 위해 우리는 여러가지 수익사업을 많이 벌였다. 그림전을 개최하기도 하고 작은만찬, 보험대리점 등 수익사업을 벌이기도 하고 기업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연구활동을 대행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늘 재정이 빠듯할 수밖에 없어서 실무자들이 늘 박봉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내가 경실련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받은 첫 봉급이 40만원이었고 몇달이 지난 뒤 60만원으로 올랐다가 4~5년 뒤에는 1백만원으로 오르고 지난 해 경실련을 그만둘 즈음엔 1백16만원을 봉급으로 받았다. 이 금액은 고교 동창들과 비교해보면 1/3에서 1/4에 불과한 금액이다.

내가 그 정도의 봉급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실무자들은 훨씬 더 적은 박봉에 시달려야 했다는 말과 같다. 사실 나는 경실련의 전체 임금비중을 낮추기 위해서 내 봉급을 아주 저임금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었다.

한번은 모재벌이 경실련 운동이 ‘처음에는 굉장히 반기업적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참 괜찮은 것같다’며 아무런 조건 없이 매년 1억원씩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해온 적이 있다.

우리는 그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했는데, 결국 받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어떤 기업에게 고정적으로 1년에 1억원씩을 받게 되면 아무래도 우리가 그 기업을 비판하기가 어렵고 결국엔 우리의 공정성에 훼손을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그 제의를 거절하면서 가슴이 참 쓰렸다. 지금까지 경실련 실무자들은 보너스를 제대로 받아본 적도 없고, 월급이 한달씩 늦은 적도 있고 때로는 월급을 50%로 깎아서 준 적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기업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보다 공정성을 훼손받는 것이 더 큰 손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기업에서 모금을 하더라도 그처럼 쉬운 방법을 택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우리 힘으로 재정을 자립할 것인가, 만약 주변에서 모금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가장 깨끗하고 공정한 돈을 모금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을 사무총장인 내가 실무자들에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실련이 이처럼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많은 정책을 만들었는데, 이는 경실련 학자들의 헌신적인 자원봉사 덕분이었다. 사실 경실련학자들이 자신들이 정책입안에 기여한 것을 돈으로 환산해서 받는다면 그 액수가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경실련 학자들의 경우 정책개발비를 받기는 커녕 오히려 회비를 내고 자원봉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경실련 학자들은 스스로 “경실련은 가라오케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경실련은 자발적으로 와서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는 돈까지 내는 곳이니 자기가 노래부르고 돈을 내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가라오케와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경실련은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학자들의 자원봉사원칙을 지키고 있다. 사실 그런 원칙에 학자들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경실련이 유지되어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경실련의 많은 우수한 실무자들도 가까운 친구들이 받는 월급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박봉을 받으면서 때로는 자신의 월급을 1/3로 낮추면서 경실련에서 일하고 있고 일하기 위해 자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실련은 이런 실무자들의 헌신의 결과로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조직이다.



정신적인 고향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는 사실 나의 정신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나의 증조할아버지께서 세우신 이래로 우리 집안 어른들이 모두 주일이면 이곳에 모여 예배를 보았고, 나도 중학교 1학년부터 이교회를 다녔다. 중고교 시절에 매주 서너 차례 정도 들르지 않으면 좀이 쑤실 정도로 새문안교회는 내 생활의 일부와도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내가 운동권이 된 뒤부터는 당회가 열릴 때마다 내 얘기가 나오지 않을 때가 없었을 정도로 나는 새문안교회의 대표적인 문제아가 되었다.

그 당시 내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를 의식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교회의 다른 신도들과 대학생 회의 이질감이 심했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께서 새문안교회의 창시자이시고 할아버지께서 교회원로 장로를 지내실 정도로 사실상 새문안교회의 기둥역할을 했던 집안의 아들을 급진적인 사회참여 운동을 한다는 명목으로 쫒아낼 수가 없었다.

솔직히 그때 내가 그런 집안배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교회에서 쫒겨났을 테고 그랬다면 새문안교회가 그 당시 기독학생운동을 앞장서서 이끄는 역할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는 그당시 전태일단식농성을 비롯해 상당히 오랫 동안 기독학생운동의 주류로서 운동을 이끌었다. KSCF운동의 큰 흐름을 새문안 교회 출신들이 만들어 냈고, 80년대 들어서는 새문안 교회 출신 가운데 상당수가 노동운동 쪽으로 들어갔다. 80학번부터는 한학년에 거의 5~6명씩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가 87년 당회에서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문을 닫아 버림에 따라 그 맥이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70년대부터 대학생회가 문을 닫을 때까지 대학생회 회원 가운데 거의 1백여명 이상이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었을 정도로 새문안교회는 사실상 우리나라 기독운동을 이끌던 기둥역할을 했던 곳이다. 또한 그 뒤 나와 함께 교회를 다녔던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출신들은 경실련 운동의 주력 부대 역할도 한다.

나를 포함해서 신대균 초대조직위원장, 유재현 사무총장, 이형모 시민의 신문사장, 유종성 정책실장, 장신규 지방자치국장 등이 모두 새문안 교회 출신들이다.

여기서 나와 신대균, 장신규가 새문안 교회 대학생회 회장을 지냈고, 이형모, 유재현은 새문안교회 청년회 회장을 지냈다.

물론 그당시 대학생회 회원들은 대개 사회참여를 부르짖던 학생들이었으나, 그 뒤 이들 가운데서 20명에 가까운 목사가 배출되었다.

예를 들면 서경석 목사, 이원희 목사, 신대균 준목, 권진관 목사, 김형기 목사, 진방주 목사, 황홍렬 목사. 조영식 목사. 이근복 목사, 유태선 목사 등이 그들이다.

새문안교회와 연관된 기억 가운데 내게 교훈을 준 사례가 하나 있다.

대학시절부터 나는 새문안교회를 어떻게 하면 갱신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의식있는 장로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분들이 장로가 되어야만 새문안교회를 갱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뒤부터 새문안교회를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세례교인의 투표를 통해 장로를 뽑으므로 우리 편에 투표할 세례교인의 수를 늘려가면 의식있는 장로를 뽑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당시 새문대학생회에 4~50명의 회원이 있었는데, 그 뒤 청년회를 조직해 세레교인을 3~40명 더 늘렸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어려워 온갖 노력을 다해 내가 고등부 반사가 된 뒤 고등부 반사들을 모두 우리 편으로 만들었다. 그 다음에는 상당수의 고등부 학생들까지 모두 우리 편으로 만들었다. 청년회를 만든 이후 몇 해동안에 걸쳐서 이뤄진 일이다.

그러고 나자 우리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조직표가 약 1백30표에 이르렀다.

그 당시 장로로 선출되려면 대략 2백50표 정도를 얻으면 된다. 대개 저녁교회에서 투표를 하는데, 그때는 교인이 많지 않아서 그 정도의 찬성표만 얻으면 선출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1백30표를 쥐고 있으니까 우리가 지지해서 장로로 선출되기는 어렵지만, 만약 우리가 반대를 하면 절대로 장로가 될 수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밀어주면 웬만큼 자기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장로가 될 수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누구를 당선시키지는 못해도 적어도 누구를 떨어뜨릴 수는 있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미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대학생회는 장로선거에서 막강한 역향력을 발휘하곤 했었다.

그런데 내가 나중에 6년뒤 미국에서 다시 돌아와서 보자 이런 개혁적인 사람들이 완전히 힘을 잃어 버린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 동안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와 고등부가 심한 탄압을 받아 조직표를 행사하던 대학생회출신들이 다른 교회로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진보성향의 청년들이 표를 쥐고 좌지우지하니까 교회안의 보수적인 장로님들이 단결해서 대학생회와 청년회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장로가 되기 전까지는 이쪽편에 잘 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일단 장로가 되고 나면 완전히 돌아서서 이쪽 편을 탄압하는 데 앞장서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돌아왔을 때 새문안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보수적으로 되어 있었다.. 열심히 조직운동을 한 것이 거꾸로 반작용을 낳은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고 서글퍼하지 않고 거꾸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가 했던 행동이 지탄받아 마땅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교회갱신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했다. 사실 교회운동은 영적인 감화감동을 통해서 이뤄져야지 일반 사회와 같이 조직 작업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로 이뤄야할 교회갱신을 우리는 세상적인 방식으로 하려고했다는 점이 잘못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때 앞으로는 절대로 세상적인 방식으로 교회활동을 하지 않겠다. 또 교회활동 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활동을 영적인 방법으로 해야 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솔직히 그 다음부터는 교회갱신을 열심히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 약간의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다. 나는 우리가 교회 갱신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활동을 한창 하고 있을 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상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셨고 모두에게서 존경받으시는 김병옥 장로님께서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경석이 네가 교회 비판을 하는 것은 좋지만,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만 비판해라. 그 이상이 되면 그것은 교회에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것이 된다”

사실 그 당시엔 교회갱신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어 그 말씀을 크게 새겨 듣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그런 주인되는 태도와 교회 갱신에 앞서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그것을 통해 감화감동을 주려는 그런 태도가 참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실 이것은 나의 젊은 날의 참회록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교회갱신을 생각하고 있는 많은 젊은 교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서경석이 운동권 목사 아냐?’


경실련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보수교회의 분들은 내 이름을 들으면 급진적인 사회참여를 부르짖는 운동권목사를 떠올렸다.

사실 나는 경실련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진보교회에 속해 있었고, 진보교회 분들과 함께 오랫 동안 진보적인 기독운동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경실련운동을 하면서 많은 보수교회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길안내를 해주신 분이 바로 손봉호교수님이다. 손교수님은 경실련을 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분인데, 이만열교수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

이교수는 미국 유학 시절에 프린스턴에서 함께 지냈던 분으로, 복음주의자이면서도 진보교회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계시는 분이다. 독재정권에 반대해서 결국 해직을 당하기도 했다.

내가 기사연에서 쫒겨날 즈음 이교수님과 손교수님은 함께 기독교윤리실천운동(약칭 기윤실)을 하고 있었는데, 이교수님의 소개로 내가 손교수님에게 경실련운동에 대한 내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손교수님도 ‘경실련과 같은 운동이 꼭 필요하다’면서 동참하셨다. 그뒤 손교수님은 중앙위원회 의장을 맡기도 하셨다.

나는 손교수님을 통해 보수교회의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내 이름을 듣고 ‘운동권 목사’라고 경계심을 갖는 분들에게 나를 보증하는 역할을 해주신 분이 바로 손교수님이시다.

예컨대 김진홍목사님과도 경실련을 하면서 신뢰감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고, 김명혁목사,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목사, 남서울교회 홍정길 목사, 영동교회 박은조 목사, 두레교회 박철수목사 등 크고 작은 많은 보수교회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진보적인 기독교운동 진영에서 쫒겨나고 경실련을 시작한 셈이어서 한동안 NCC와의 관계가 소원했었다. 반면 경실련을 시작하면서 복음주의 교회 기독교인들을 많이 만나고 또 이분들이 경실련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는데, 나는 사실 그런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특히 한국대학생선교협의회(CCC) 김준곤목사님(CCC)과 인간적인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 것은 경실련에 보수교회 청년들이 많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내가 진보기독교운동을 하던 젊은 시절에는 김목사님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그런데 내가 복음주의적 입장을 되찾게 된 뒤에는 그분들의 말씀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분들과 내가 갖는 경험영역의 차이 때문에 때로는 그분들이 내 생각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핵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자연 그분들과 깊은 신뢰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특히 김중건 목사님은 CCC운동을 통해 경실련운동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셨는데, 그것은 7~80년대만 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김목사님은 지금까지 사회구원을 도외시하고 개인구원만 추구해 왔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나는 김목사님과 만남을 가지면서 김목사님이 CCC운동이 복음전도를 하나님의 지상명령으로 열심히 전하는 단체이지만, 사회참여의 필요성도 인정하고 관심을 갖는 단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서울 정동 CCC회관에서 신앙간증과 함께 내가 왜 경실련운동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한 적이 있는데, 그야말로 그 분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지방조직을 하기 위해 지방에 내려갈 때 나는 가장 먼저 CCC를 찾아 간다. CCC모임에서부터 경실련회원을 확보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경실련에서 많은 일을 했던 양혁승간사만 해도 CCC출신이다. 이밖에도 CCC출신들이 경실련 안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고, 우선 나만 해도 대학 1학년 시절에 CCC에서 활동한 경험을 갖고 있다.

사실 CCC를 비롯한 많은 복음주의단체나 교회들이 그동안 어떻게 하면 기독교적인 방법으로 사회참여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 왔다. 그러다가 경실련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으로 사회참여를 한다고 하자 그것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지지하게 된 것이다.

나는 경실련 활동을 하며서 수많은 복음주의 교회에 가서 설교와 강연을 했는데, 이분들이 내 신앙간증을 듣고 굉장히 감동을 받는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복음주의에 있다가 진보적인 신앙으로 간사람은 많다. 하지만 진보교회에 있다가 복음주의로 돌아와서 사회참여를 한 사람은 많지 않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나처럼 생생하게 실천적으로 그 과정을 걸어온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내 이야기가 그분들에게 충격을 주고 감동을 주었던 것같다.

보수교회 분들은 자신들은 민족사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열등감이 있는데, 내가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역할을 했던 셈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내가 경기도 양재의 합동측 신학교에 가서 강연을 하고 나왔을 때 한 신학생이 내게 “목사님이 우리에게 신발을 신겨 주셨다. 우리는 지금까지 골방에서 하느님께 기도만 드렸는데, 이제부터는 목사님께서 신겨 주신 신발을 신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말이다.

실제로 복음주의진영은 지금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 과거에 체제에 안주하며 사회참여를 도외시했던 것을 반성하면서 성경적인 방식으로 사회참여를 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경실련이 보수교회 분들의 올바른 사회참여를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송월주 스님과의 만남


나는 경실련 활동을 하면서 만난 많은 어른들 가운데서도 월주스님과의 만남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나 목사안수를 받은 사람이지만, 절친한 친구인 박세일이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까닭에 방학만 되면 책을 싸들고 절을 찾을 정도로 불교와도 가까웠다.

하지만 아무래도 기독교운동을 계속 해오다 보니 불교계 어른들과는 만남이 적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월주스님과 만나게 되면서 불교쪽과의 깊은 교분을 갖게 되고, 경실련에도 불교계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내가 월주스님을 만나게 된 계기도 경실련 활동을 통해서이다. 경실련을 출범하고 2개월 뒤쯤 뒤인 어느 날 월주스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스님께서 경실련에 가입하시고 싶다는 말씀이었다. 그말씀을 듣고 나는 너무나 감사하고 황공해서 직접 찾아뵙고 경실련의 공동대표를 모시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고 월주스님께서도 수락을 하셔서 경실련 출범 3개월 뒤부터 지금까지 6년간 공동대표를 맡고 계신다.

우리가 흔히 ‘저분은 경실련 스타일의 분이시다’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월주스님은 그야말로 참 경실련 스타일의 분이다.

우선 합리적이고 온건하고 그러면서도 개혁적이시다.

나는 경실련을 처음 만들면서 경실련운동은 참 기독교운동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런데 월주스님은 경실련은 참 불교운동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경실련운동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운동이라는 말씀이시다. 스님께서는 경실련1주년 자료집에 ‘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은 불교적이다’라는 글을 직접 써주시기도 했다.

월주스님이 경실련 공동대표를 맡으신 뒤 경실련에 불교계 분들이 많이 참여하게 된 것도 여러 면에서 매우 의미깊은 일이었다. 실제로 박종후스님, 범산스님, 법타스님, 김동흔씨 등 불교계인사들이 경실련에 참여했다. 그리고 경실련안에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경불련)이 만들어 지기도 했다.

불교계도 기독교처럼 급진적인 불교운동과 체제에 안주하는 보수적인 불교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두가지 경향이 다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경불련이다.

따라서 월주스님을 중심으로 경실련의 불교계 인사들이 양심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묶어낼 수 있는 그런 불교운동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불련을 만든 것이다.

경불련은 그 뒤 자비의 집 건립운동 등 불교의 사회참여운동을 주도했는데, 이런 모든 운동이 월주스님의 리더쉽 아래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불교계 개혁에도 앞장 서셔서 서의현총무원장을 내쫒는 일에도 경불련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 뒤 월주스님은 조계장총무원장 선거에서 승리해서 총무원장이 되셨다.

월주스님은 총무원장에 당선된 뒤에도 자신이 총무원장을 당선된 데는 경실련운동, 공선협활동에 종사하면서 불교의 사회참여를 앞장서온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공공연히 말씀하시곤 한다.

물론 총무원장이 되신 뒤에도 변함없이 경실련 공동대표를 맡으시면서 경실련 활동도 애정을 갖고 펴고 계신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월주스님과 깊은 친교를 맺어 왔는데, 나는 스님과 나의 이 깊은 친교가 앞으로 우리나라의 종교 분쟁을 극복하는 데 상당히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상당히 전투적이고 배타적 경향을 갖고 있어 자칫하면 불교와 기독교가 종교적으로 굉장히 대립될 위험성이 항상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이 선거 때면 종종 표면화되곤 한다.

때문에 우리는 지방경실련을 만들 때마다 공동대표로 목사 한분과 스님 한분을 모시곤 했다. 실제로 스님과 목사님이 함께 공동대표를 하는 지방경실련이 참 많다.

이렇게 되면 스님과 목사님이 함께 지방경실련 활동을 할 수 있고, 나는 이런 친분관계가 장기적으로 우리나라의 종교간의 대립과 갈등을 완화시키는 데 상당히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내가 정치권에 나오게 된 데에도 월주스님의 커다란 격려가 있었다. 특히 월주스님은 이번 6.27선거에서 지역할거주의, 정치의 사당화가 노골화되는 것을 보고 굉장히 분개하시고 개탄하셨다. 그러면서 “나라가 이렇게 지역감정으로 갈갈이 찢겨지는 상황에서는 서총장같은 이가 정치에 참여해서 지역할거주의를 혁파하고 정치개혁을 이뤄야 한다”며 내가 정치참여 결정을 내리도록 힘이 되어주셨다.

스님은 5공 시절 불교법난이 일어나 총무원장에서 내쫒김을 당하고 독재정권의 박해를 받으신 경험을 갖고 계셔서 매우 개혁적인 입장을 가지고 계시다. 실제로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장이 되고 난 뒤 불교의 사회참여가 활발해 지면서 불교의 위상도 대단히 높아 졌다.

그리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김수환추기경 다음으로 중요한 우리나라 종교계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모신다.

나는 스님이 앞으로도 불교의 자원을 활성화시키고 불교가 우리나라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데 엄청난 공적을 쌓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3가지 인연


돌이켜 보면 내게는 젊은 시절 3가지의 의미깊은 인연이 있다.

그중 하나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감방에 갇힌 나를 정확하게 사건을 조사해 석방시켜준 한 장교에 관한 이야기이고, 나머지 두개의 이야기는 경직되었던 내 젊은 시절을 반성하게 해주는 그런 인연이다.

우선 첫 번 째 인연은 내가 동일방직노동자들의 복직캠페인을 벌이다가 감옥에 갔을 때 만난 김진선 장군에 관한 얘기다.

당시 나는 우리사회가 모두 복학, 복직 분위기로 들떠 있는데 유독 노동자들만 복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항의하는 캠페인을 벌이다가 감옥에 갇혀 있던 때였다. 80년 서울의 봄이 한창 무르익어갈 때였다.

사실 감옥에 가게 되자 죄목은 별거 아니었지만, YH사건으로 들어갔다 나온 지가 얼마되지 않아 보석중이었으므로 꼼짝 없이 1년 정도는 감옥살이를 해야할 형편이었다.실제로 검찰관은 1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당시는 계엄중이어서 수경사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나는 ‘모두가 복직되는 상황인데 노동자들만 복직이 안되어 생존권에 위협을 받고 있으니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노동자들을 위한 캠페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요지의 최후진술을 했다.

그랬더니 재판장이 감동을 받고 재판이 끝난 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수소문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내게 선고는 1년을 하되 바로 형집행면제로 그 다음날 곧바로 풀려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1년은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것을 예상과 달리 3개월만에 출감했다. 아이러니칼한 것은 만약 그때 군사재판이 아니었으면 나는 꼬박 실형을 살아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92년경 경실련 사무총장을 할 때 TV 사랑방좌담에서 기억나는 옛날이얘기를 하는 시간이 있어 내가 이 재판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수방사(수경사의 후신) 법무참모가 TV에서 그것을 보고 옛날 서류를 모두 뒤져 보니 그때 과거 내 재판기록이 나왔는데, 당시 재판관이 바로 현재 자기가 모시고 있는 김진선사령관이었다. 내가 재판받을 당시에는 수경사 중령의 신분이었다.

그래서 이런 인연으로 나는 김진선장군과 십여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고, 다시금 옛날의 우의를 돈독하게 되새겼다. 이 분은 나중에 2군사령관 대장까지 진급해 육군참모차장을 지냈다.

나는 이분과의 친분 덕에 뒤에 공선협활동을 하면서 이지문중위사건으로 군과 대립할 때 마침 이분이 참모차장을 지내고 있던 때여서 함께 의견을 교환하며 군과 시민사회의 반목을 푸는 데 가교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뒤 이분은 경실련 베트남돕기운동에도 후원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봐도 김장군님은 재판관을 했던 당시 매우 용기있고 진지한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분이 다른 사람일에 무관심한 분이었으면 내가 비록 최선을 다해 최후진술을 했다고 해도 ‘운동권이 하는 말이 으례 그러려니’하고 무심코 듣고 넘겨 버렸을텐데 그처럼 자세히 조사하고 과감하게 석방시켜준 것은 그분의 훌륭한 점이다.

또한 나는 나대로 매 순간을 성실하게 살고자 했던 자세가 아마도 그런 행운을 가져다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군사재판이 뻔한 건데..’하면서 성의 없이 최후진술을 했다면 재판관의 가슴에 감동으로 주지 못했을 테고 이런 감동적인 인연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 한가지는 김진홍목사와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시 만나기까지의 인연이다.

나는 75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징역을 살다가 석방된 뒤 신학교 진학이 좌절되자 김진홍목사와 함께 남양만 활빈교회에서 농촌활동을 할 생각으로 그 지역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 당시 김목사를 여러 면에서 돕고 있었고 그의 중요한 대화상대자였었다. 하지만 김목사가 내게 함께 일하자고 했을 때 한동안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을 했다.

왜냐 하면 그 당시 김목사에 대한 평가가 양쪽으로 상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김목사가 도시빈민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라는 평가였고, 또 한편에서는 민중운동적인 차원에서 볼 때 ‘김목사가 하고 있는 사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권위주의적으로 군림하는 모습이 아닌가’하는 비판이 있었다.

실제로 제정구씨만 해도 처음에는 김목사와 함께 일을 하다가 뒤에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빈민운동을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열심히 도우면 모든 일이 잘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활빈교회 총무를 맡아 아예 남양만에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정착해서 살 생각을 갖고 땅도 3천평 정도 사서 최소한 몇해 동안은 농민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 당시 내 처는 결혼을 한 뒤 임신한 상태에서 대학원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하던 상황이어서 부모님이 계시는 문화촌 집에서 지내고 나는 남양만 활빈교회에서 그곳의 실무자들과 공동체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6개월만에 그곳을 나오게 된다. 김목사의 교회운영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껴서이다.

내 생각에는 ‘농민운동이 제대로 되려면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문제를 고민하도록 해야 옳은 것인데, 당시 활빈교회의 농촌사업은 내가 보기에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문제를 풀어나가도록 돕는 방식이 아니라 김목사가 일종의 활빈왕국의 왕이 되는 방식으로 이끌고 있다’고 느꼈다. 말하자면 김목사가 너무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이라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곳에서 더 이상 일할 의욕을 잃어버리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나 뿐만 아니라 그당시 김목사님과 같이 일했던 실무자들도 대부분 두서너해만에 그곳을 떠났다. 이유는 내가 느꼈던 문제의식과 비슷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목사 자신도 그 이후에 굉장히 곤경을 겪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소를 도입했는데, 그 소를 도입하고 분양하는 과정에서 농민들과 약속을 지키지 못해 엄청난 수모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뒤 김목사는 그런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 지금은 두레마을이라고 하는 훨씬 더 큰 공동체활동을 하고 있으며, 김목사를 따르는 사람도 훨씬 많아 졌다.

나는 활빈교회에서 김목사의 활동모습에 실망하고 헤어진 뒤로 한동안 김목사를 만나지 않고 지내다가 그 뒤 미국에서 돌아와 경실련운동을 새로 시작하면서 김목사를 다시 찾아가 그분을 경실련 지도위원으로 모셨다.

그 뒤부터는 적어도 한해에 몇번씩은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 성원하는 그런 좋은 관계를 회복했다.

나는 김목사와 좋은 관계로 회복하고 난 뒤 과거 내 모습을 회상하면서 반성하는 마음을 가졌다.

내가 젊은 시절엔 농민운동적인 차원에서만 김목사를 바라보다 보니까 그분이 많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도저히 운동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활빈교회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다시 그분을 만나보니까 김목사처럼 오로지 한길을 걸으며 농촌에서 공동체 만들고 그 꿈을 이뤄가는 분이 관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으로부터 존경심이 생겼다.

오히려 젊은 시절 내가 그분을 바라보던 시각이 너무 이상주의적이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이 생겼다. 물론 과거 내 관점이 반드시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운동적인 관점으로만 보고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지금도 김목사에게 단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나에게도 단점은 수없이 많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기대했던 이상적인 민주성이 제대로 관철되지는 않았다고 무조건 김목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지금 김목사님이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고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정말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

세번째의 경험은 YH사장인 장용호씨와의 인연이다.

산업사회선교회 총무 시절 나는 YH사건으로 구속되어 석방된 뒤 ‘YH인사’로 매스컴에 부각받기도 했던, YH사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그 당시 우리는 YH 사장이라고 하면 노동자들을 내팽겨치고 미국으로 도망치려한 악덕기업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미국에 갔을 때 우연히 뉴욕에서 YH사장인 장용호씨를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당시 내가 뉴욕교포사회에서 한창 민주화운동을 펴고 있었던 때였고, YH인사라는 사실도 알려져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만나서 그분의 얘기를 들어 보니까 사실 그 분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분은 그당시 자신은 웬만큼 돈을 벌었으니 미국에 이민가서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먼저 이민을 온 뒤 그 회사를 친척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친척이 회사운영을 잘못했는지 그런 문제가 일어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자신은 완전히 악독한 기업주로 찍혀 매도당하게 되어 참 억울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얘기였다. 내가 직접 만나 보아도 그분이 그렇게 악독한 기업주같이 보이지 않았고 그저 우리가 어디서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선량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실제로 그분은 뉴욕 한인사회에서 불우한 아동들을 위해 장학금을 준다거나 하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났을 즈음 사실 내가 굉장히 어려운 때였는데, 내게도 선뜻 몇천불을 주시며 도움을 주셨다.

때문에 내가 그분을 다시 만나고 나서 참 느낀 점이 많았다. 우리가 어떤 특수한 시대상황에서 어떤 한 사람을 정말 악마처럼 묘사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이 반드시 그처럼 비난받아야할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냥 보통사람이 어떤 상황 속에서 악마처럼 묘사되고 국민적인 지탄을 받는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사람을 집중적으로 비난해야할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중심을 잃지 않고 그 사람 편에 서서 그 사람의 여건도 이해해줄 수 있는 열린 마음과 포용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점이 내가 그분과의 인연을 통해서 깨닫게 된 교훈이다.



재야운동을 생각한다


지난 91년 경제정의 7,8월호에서 나는 최장집교수와 ‘경실련운동 무엇이 문제인가’를 주제로 대담을 벌인 적이 있다.

나는 이 대담에서 내가 경실련을 시작할 때 운동권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전제하면서 “경실련은 마음의 문을 열고 있지만, 만약 연대의 결과로 우리가 중간층에 내린 뿌리가 훼손되거나 거꾸로 우리의 바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다 준다면 재야운동과 연대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나는 경실련이 맨 처음 출범할 때 기존의 운동권과 일단 명확하게 선을 긋고 출범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초창기에 경실련이 우리는 운동권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던 이유도 이런 점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대담에서는 경실련을 바라보는 시각 이외에도 현재 우리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시민운동에 대한 견해, 재야운동과 시민운동에 대한 연대방법 등 문제가 주제로 올랐는데, 두 사람의 견해차가 매우 컸다.

솔직히 나는 당시 논란이 되었던 이런 의견의 차이가 지금에 와서는 내가 말했던 입장에 상당히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87년 6월항쟁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바뀐 상황에 바르게 부응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이 나와야 우리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재야운동 내에서 그런 새로운 운동을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거꾸로 운동권으로부터 축출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처럼 내가 경실련을 만든 이유는 운동권 내부에서의 개혁이 불가능하므로 운동권 외부에서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서 운동권에 영향을 끼치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러다 보니 이런 과정에서 자연히 시민운동과 재야운동 사이에 서로 헤게모니싸움을 벌이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만약 그때 경실련이 재야운동의 해게모니를 인정하면서 그 틀안에서 운동의 방식만 조금 온건하게 바꿨다면 시민운동은 우리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냥 재야운동이 얼굴을 바꿔서 나타난 아류로 인식되어 우리나라의 신중산층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을 것이고 결국엔 재야운동의 면적을 약간 넓혀주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이뤄내는 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사회운동이 바뀌어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과도기적으로 기존의 재야운동과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실련은 만약 재야의 노선이 옳지 않으면 서슴없이 비판하지만, 옳은 노선이면 함께 연대한다는 그런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사회 사회운동의 주도권이 재야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서서히 이전하게 되었으며, 이런 과정이 재야운동 진영에 뼈아픈 상처를 주었다.

나는 재야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이런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솔직히 나 자신도 재야운동 출신인 까닭에 우리나라 재야운동의 이런 운명에 대해서는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런데 재야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경실련이 아주 기회주의적이고 변화된 상황을 이용해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경실련은 그러한 운동은 아니다.

나는 재야운동이니 시민운동이니 하며 편가르기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좀더 큰 틀에서 이 모든 사회운동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경실련까지 포함해서 이런 움직임은 사실 우리사회의 사회운동이 과거 군사독재의 사회운동에서 민주시대의 사회운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과도기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전환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편에서부터 다른 한편까지 완료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거의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그 사회에서 가장 전환이 쉬운 부분부터 전환해 나가게 되는데, 경실련은 바로 이 부분에 속하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경실련이 나오기 전에도 김지하 시인같은 분이 전환을 했고, 얼마 뒤 장기표씨가 전환을 했으며, 이보다 좀 늦었지만 이부영씨, 김근태씨가 차례로 전환을 했다. 최근에는 참여연대도 전환을 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가 전환을 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과거 재야운동의 거의 대부분이 전환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전환이란 사회주의적 변혁론을 폐기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런 전환의 과정이라는 것이 어차피 이념 대결과 갈등의 연속이기 때문에 자연히 후유증이 남게 마련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경실련의 등장은 우리사회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 전환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도록 했으며, 전환과정에서 일어나는 후유증을 상당히 줄여주는 데 기여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이러한 전환을 비교적 빨리 이루었다. 필리핀과 비교해봐도 필리핀은 우리나라보다 민주화가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나라다.

따라서 나는 경실련과 재야운동이 근본적으로 대립된 관계가 아니라 이러한 전환을 이뤄 가는 과정에서 그 시기가 약간 달랐던 운동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이제 우리사회가 대체로 전환을 이루었으므로 지난 독재 시기에 고난을 당하고도 스스로 희생을 감수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태까지는 그분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에 우리사회의 인사들이 상당히 인색했다. 그 이유는 재야인사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자칫 오늘 날 재야운동을 거꾸로 강화시켜 사회적 혼란을 증폭시킬 위험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지난 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생한 사람들의 명예를 존중하고 역사적으로 바르게 평가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이런 작업을 해야 한다. 지난 시기 민주화를 위해 고생한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제대로 높이 평가하고 그 사람들을 존경하는 일이 바로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


사람들은 나를 평할 때 일욕심이 너무 많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일욕심이 참 많다.

어떤 계기로 어떤 문제를 저렇게 해결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하지 않고는 못배긴다. 어떨 때에는 나 스스로도 일 욕심을 자제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요즈음은 스스로 일 욕심을 자제하려고 노력한다.

그동안 일욕심탓으로 젊을 때나 지금이나 단체에서 일을 하면서 새로운 일을 참 많이 벌였다. 5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경실련이 추진한 사업을 보고 사람들이 감탄을 하곤 하는데, 그 바탕에는 나의 일 욕심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가 명예욕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진 않았다.

두번째로는 나는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나쁘게 표현하면 너무 앞에서 끌고 나가는 편이다. 이런 내 특징은 사실 지금의 내 처와 나를 맺어준 계기이기도 하다.

내가 ‘걸림돌’이라는 모임을 조직해서 활동을 벌이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줄 정도로 지나치게 의욕적이라는 말을 아내가 조언해주는 것을 보고 내가 아내에게 처음으로 호감을 가졌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점은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것같다. 어려움을 돌파하는 엔진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독주한다는 평을 듣는다.

세번째로 나는 상당히 솔직한 성격의 소신파다. 말하자면 내가 믿는 대로 사심없이 발언하고 밀어부치는 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운동권과도 엄청나게 충돌을 했고, 보수와 진보의 양편에서 협공을 받으면서도 소신있게 경실련을 밀고 나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또한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선뜻 고칠 줄 아는 소신파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도 경실련사무총장을 하면서 실수한 것도 많았고 잘못 판단한 적도 많았지만, 실무자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내가 보기에도 그 지적이 옳으면 나는 그 자리에서 무조건 잘못된 점을 고쳤다.

제 아무리 젊은 사람들 앞에서든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내 과실을 인정하고 부끄러운 부분까지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것은 내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경실련의 젊은 실무자들이 내게 깊은 신뢰를 보낼수 있었던 것도 내가 굉장히 추진력이 강하다든지 능력이 있다든지, 아이디어가 샘솟는다든지 그런 점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 잘못을 깨닫는 즉시 그 자리에서 고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나는 성격적으로 결함도 많은 사람이다. 우선 성격이 너무 급하고 다혈질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실수를 많이 하게 되고 화도 잘내고 반면 사과도 잘한다.

사람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참을성이 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이가 상당히 든 후에는 자기의 성격을 고치기위해 노력하고 또한 성격개조에 성공하는 사람은 참으로 쉽지않다. 그래서 인내심을 키워 나의 다혈질을 다스리는 것이 요즈음 내가 매일매일 노력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