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고정하세요’
우리나라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은 너무나 불합리한 조항이 많아 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매우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경실련은 처음부터 합법적인 운동을 하겠다는 원칙을 세워두었기 때문에 집시법이 비록 악법조항을 지니고 있어도 어떻게 해서든지 이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경실련 출범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데모가 있었지만, 한번도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
때문에 경실련 초창기만 해도 우리가 데모를 한다면 ‘혹시나 충돌이 일어날까’ 걱정하던 경찰들이 얼마 뒤부터는 경실련이 데모한다고 하면 으례 합법적인 것이거니 하고 안심하곤 했다.
하지만 모순이 많은 집시법을 지키려다 보니 우리로서도 고충이 많았다. 우리나라 집시법을 보면 주요 간선도로나 주한 외교사절 숙소와 대사관에서 100m지점 안의 지역에서는 집회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주한외교사절의 수가 무진장 많다 보니 이 곳을 피해 데모를 한다는 게 도심 지역에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맨 처음 데모 때의 일이다.
서강대에서 창립대회를 치르고 시청앞까지 가두시위를 하려고 집회허가를 받으려니까 두 개의 경찰서 관내에 결쳐 있어 시경으로 가야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경에 가서 서울지도를 보니까 서강대에서 시청앞에 이르는 사이에는 영국대사관, 스웨덴대사관 등 대사관은 물론 대사관 숙소가 널려 있어 데모불가지역인 이 지역 근방 1백미터를 동그라미로 그리고 나면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시경 간부에게 “좋소, 그러면 우리는 시위를 하다가 대사관 1백미터 지점에 도착하면 거기서 데모를 잠시 멈췄다가 1백미터 지점을 지나면 또 다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방법으로 해서 시청앞까지 가두시위를 하겠소”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시경간부가 내 팔을 붙잡고 “아유, 목사님 왜 그러십니까, 고정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도 어이가 없어 두 사람 모두 웃고 말았지만, 서울 도심에서 데모를 한번 하려면 이 정도의 곤욕을 치러야 법을 지킬 수 있었다.
한번은 민중당원들이 데모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경찰과 대치를 벌이다가 협상을 하더니 데모금지 지역인 대사관 숙소 1백미터내 지역을 지나가며 시위를 했다. 사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왜냐하면 경찰 스스로가 법을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법을 엉터리로 만들어 놓고 경찰 스스로 적당히 봐주는 식으로 하는 셈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법치주의가 올바로 설 수가 없다.
때문에 나는 경실련과 같은 시민단체가 경찰이 법을 지키도록 일깨워 주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집회신고를 하면 경찰에서 조건통보를 해주는데, 그 내용이 ‘구호를 외치지 말것, 전단을 나누어 주지 말 것’ 하는 식으로 말도 안되는 조건인 경우가 많다.
경찰의 통보 대로 하자면 구호도 외치지 말고 전단도 나눠주지 않으며 데모를 하라는 말인데, 사실상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 형식적으로 통보한 조건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이럴 때 경실련은 ‘그런 조건통보는 받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거절의 뜻을 보였다.
한번은 경찰서에서 보낸 그와 유사한 내용의 조건통보를 안받겠다고 했더니 담당 경찰관이 아주 섭섭하다는 기색을 보이며 “이건 순전히 형식일 뿐이고 실제로는 마음대로 하셔도 되는데, 형식적인 절차를 갖고 까다롭게 그러시냐”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래서 내가 “우리는 형식이 중요하다, 이렇게 엉터리 조건통보가 어디에 있느냐, 전단도 나누어주지 않고 구호도 외치지 않으면서 무슨 시위를 하느냐, 우리가 깨우쳐 주려고 했던 것은 법치의 중요성이다, 그러니 당신네들부터 법을 지켜라”고 말해 주었다.
이런 싱갱이를 몇차례 하게되면 경찰의 조건통보내용도 보다 합리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게 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노태우 정권 때 수서사건 규탄집회를 탑골공원에서 열려고 집회허가신청을 냈더니 종로구청에서 갑자기 파고다 공원 사용금지통고가 나왔다.
그래서 어찌된 영문인지를 알아 보았더니 집시법에 ‘공원에 물건을 고정적으로 부착을 하려면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그 조항 위반이어서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우리는 플래카드만 부착할 계획인데, 건축물도 고정물도 아닌 공원에 그것을 못한다는 조항이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면서 사용금지통고를 내린 종로구청장을 직권남용으로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랬더니 얼마 뒤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사실은 중앙정보부가 내린 지시였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래서 우리가 ‘그게 사실이라면 중앙정보부장을 고발하겠다’고 또 다시 엄포를 놓자 결국 종로구청에서 집회사용허가를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합법적인 시위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경실련의 합법시위 관행도 실은 오랜 투쟁의 과정에서 정착된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합법시위를 지키다가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어 흐뭇했던 경우도 있다.
한번은 내무부에서 지방세 과표를 현실화하겠다고 했다가 백지화를 해버려 경실련이 내무부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무부 담당자에게 ‘우리와 이문제를 놓고 지상토론을 해보자’라고 요청했는데 도통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무부가 우리와 지상논쟁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지도를 봤더니 정부종합청사 바로 옆길에 시위 가능 지점이 있었다. 그곳에서 집회신고를 내면 정부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만약 거절하면 우리가 거꾸로 경찰을 고발할 수도 있다. 때문에 종합청사 옆길에 집회신고를 해놓고서는 다시 내무부와 협상에 들어갔다.
‘만약 우리와 지상토론을 하지 않으면 종합청사 바로 옆에서 데모를 하겠다’
이렇게 엄포를 놓았더니 내무부가 두손을 들고 토론에 나서겠다고 해서 지상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물론 집시법이 워낙 문제가 많다 보니 합법적인 데모를 하다 보면 억울한 경우도 당하기 마련이다.
태국에서 정치사태가 일어나서 짬롱시장이 군부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짬롱시장은 경실련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 분으로 경실련과 매우 가까운 인사이다. 따라서 이 소식을 듣고 경실련에서 태국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하기로 결정하고 집회허가 신청을 냈다.
집시법상 집회신고는 48시간 전에 마쳐야 하므로 일단 집회허가 신청만 해놓은 상태에서 집회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 짬롱 시장이 석방이 되어 버렸다.
물론 짬롱시장의 조기 석방이야 두손 들어 환영할만한 일이었지만, 우리의 집회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만약 그때 우리가 급한 사안인 만큼 눈 딱 감고 허가신청을 받기 전에 데모를 했더라도 경찰에서 불법이라고 우리를 잡아가지 않았을 터이므로 솔직히 마음 한편에서는 ‘괜히 법을 지키려다 데모도 못하고 말았구나’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사실 48시간이전의 집회신고라는 조항은 옳은 것이 아니다.
이런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집회를 할 때 이처럼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강조했던 데는 경실련이 보통시민들이 주인인 단체라는 점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법적이고 평화적이지 않으면 평범한 보통시민들이 부담없이 참여하기 어렵다.
법을 어긴 세 번의 사례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내가 반드시 합법적인 운동만을 고집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사회운동이 합법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돌이켜 보면 나 스스로도 박정희, 전두환정권 당시 비합법투쟁을 했었던 사람이다. 긴급조치와 국가보위법, 계엄법 등 독재정권을 상징하는 법은 죄다 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합법이냐 아니냐는 그 시대, 그 때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실련운동을 하면서도 나는 세번쯤 합법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던 적이 있다.
한번은 서초동 꽃 동네에 철거반원들이 밀어닥쳐 우리가 몸으로 막다가 닭장차에 실려 갔던 경우이고, 나머지 두번은 공선협 활동을 하면서였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얼마전 까지만해도 우리나라의 선거법은 집시법 못지 않게 문제가 많아서 그것을 곧이 곧대로 지키다 보면 국민들이 도무지 각 후보의 주장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 수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런 상황으로는 제대로 된 후보를 선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책캠페인을 벌였다. ‘정책캠페인’이란 후보자들의 공약이 옳은지 아닌지를 평가하고, 그 평가결과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인데, 어느 후보에게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시민운동단체가 나서서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당시 선거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그런 노력들을 실행에 옮기기가 무척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좋은 뜻을 가진 정책캠페인조차 못한다면 시민운동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을 갖고 실험적으로 몇 군데서 정책캠페인을 강행했다.
처음에는 선거관리위원회와 약간의 실갱이가 벌어졌지만, 정책캠페인의 원래 의도가 어떤 특정후보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선관위도 우리를 고발하지는 않았다.
합법의 원칙을 깼던 세번 째 사례도 공선협 활동 때의 일인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지문중위의 군부재자 투표부정행위 공개 때의 일이다. 그 당시 경실련에는 이지문 중위 이외에도 많은 군인들이 군 내부의 비밀을 제보해오곤 했다.
그중에 한 제보의 내용을 보니 병사들에게 TV시청 못하도록 하는 등 보안부대가 병사들의 참정권을 심하게 제약하는 지시들을 내려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TV시청금지 지시가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항이 비밀로 분류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 사실을 공개하기로 했다. 그 뒤 이 내용이 각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국방부 측에서 우리에게 군사기밀보호법 위반혐의로 책임을 묻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결국 국방부는 경실련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고발하지 못했다. 워낙에 국민들의 엄청난 지지가 우리들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국방부가 우리를 잡아 가뒀다면 아마도 국민들의 엄청난 저항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이런 몇가지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운동을 펴나갈 때 모든 것을 꼭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법을 어길 수밖에 없을 때에는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에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경우에 한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불법파업이오’
어느 재벌 회사의 간부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회사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났을 때 만약 노동조합이 처음부터 끝까지 법을 지키면 회사가 견디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노동자들을 자꾸 약을 올리지요. 그러면 노조가 처음에는 참다가 나중에는 참다 못해 법을 어기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는 공권력을 동원해서 어렵지 않게 노사분규를 진압할 수 있지요”
그분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스스로 자신의 묘혈(墓穴)을 파고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솔직히 섬찟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느낀 바도 많았다. 나는 이 말에서 두 가지 점을 깨달았다.
하나는 기업주는 스스로 나서서 공정하게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업주가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면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 하나는 이런 상황을 딛고 노조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면 매우 지혜롭게 운동을 풀어 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 기업, 언론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상황을 딛고 노동자들의 이익을 절대로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노동운동도 국민 대다수가 지지할 수 있도록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노동운동이 기득권층에게 일방적으로 억눌려 지냈던 것을 감안하면 억울한 점도 많고, 내세우는 주장에 정당성도 많을것이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그동안 일반국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번번이 실패해왔고 언론의 지지도 거의 받지 못했다.
그 바탕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특히 중요한 이유는 ‘합법운동을 마치 문제가 있는 운동’으로 여긴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합법운동을 ‘어딘가 한계가 있는 운동, 체제내에 안주하는 운동’이라고 하찮게 보고, 과격하게 싸워 장렬하게 깨지고 감옥에 들어 가는 운동이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옳았지만, 변화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옳지 않은 측면이 더 많다. 아니 오히려 재벌그룹 간부가 이야기한 것처럼 ‘기업주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물론 합법운동의 타당성을 따지기에 앞서 법을 어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악법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악법인데도 지키란 말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그 법이 악법이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알기 전에는 악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악법을 지키는 과정에서 그것이 얼마나 악법인가를 국민들이 알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악법이 왜 악법인지’를 드러내는 운동이 중요한 것이다.
그 동안 공선협이 활발한 활동을 펴면서 지금은 선거법이 많이 고쳐졌지만, 공선협이 처음 발족할 당시만 해도 정말 문제가 많은 선거법 아래에서 여러 차례 선거를 치렀다. 하지만 그 악법을 철저하게 관철시키도록 노력하는 과정에서 온 국민이 ‘선거법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게 되었고, 부족하나마 선거법이 고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사례도 많다.
이문옥 감사관 구속에 항의하는 집회를 가질 때의 일이다. 검찰에 항의할 목적으로 검찰청 앞에서 데모를 하려는데, 검찰청 주변은 모두 데모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파고다 공원에서 출발해서 명동입구까지 간 뒤 데모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구태여 데모를 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질문도 제기될 법했다. 그러나 나는 집시법을 지킬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왜냐면 이렇게 해서 집시법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법인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국회에서 토지공개념 관련법을 다룰 때 방청석에 앉아 이를 지켜 보았는데, 법안이 상임위원회에서 법안심사소위로 넘어가자 방청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실 모든 법안은 법안심사소위 안에서 막후 협상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아 우리가 제 아무리 상임위 방청을 하고 그것을 토대로 의정감시를 하려고 해도 가능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부터는 법안심사소위를 방청하겠다고 했다. 당시 소위 방청의 허용은 소위위원장의 재량에 달린 문제인데, 다른 소위 의원들은 모두 호의적인데 유독 위원장만 찬성하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의원의 지구당 사무실 앞에서 ‘왜 시민들의 의정감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느냐’고 시위를 할 생각으로 집회신고를 냈다. 그랬더니 그 지역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며 금지통보가 왔다. 그 다음에 또 다른 곳에 집회신고를 냈더니 이번에도 금지통보가 내렸다.
나는 경찰서담당 정보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왜 자꾸 금지통보를 하느냐고 항의하였다.
정보과장은 제발 자기 관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집회를 해달라고 하며 자기 관내에서는 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나는 “아니요, 우리는 끝까지 집회신고를 할겁니다. 특히 당신네 관할경찰서 지역안에서 집회가 가능한 한 평의 땅이라도 있으면 거기서 데모를 하겠습니다. 그게 한달 후든 두달 후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언제고 집회허가를 내줄 수밖에 없는 때가 오면 그때 집회를 열어 당신들이 집시법을 얼마나 악용했는가를 만천하에 폭로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정보과장이 당황해하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 의원으로부터 사과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나 이미 법안심사소위 방청의 시기는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사과를 받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이처럼 법을 지킨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명분상으로 우위를 갖게 되는 것이므로 때로는 엄청나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학생운동을 보면서도 법과 질서를 지키려는 노력이 적은 것에 대해 늘 아쉬움을 갖는다.
한번은 지방강연에 가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연세대 앞을 거쳐 김포공항으로 가는데, 학생들이 차도를 점거하고 데모를 하고 있었다. 도시빈민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시위인 듯 보였다.
그런데 5분이 지나도 해산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내가 차에서 내려 학생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야단을 쳤다.
“도대체 너희 학생들이 무슨 자격으로 시민들의 발을 묶느냐. 너희도 법을 지켜라. 도대체 스스로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무슨 민주주의하겠다는 거냐”
그러자 몇몇 학생들이 나를 알아보고 ‘서목사님 왜 이러십니까’하며 말리기도 했고, 어떤 빈민은 내게 욕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 당시 정말로 학생들의 행동에 대해 무척 분개했다. 학생들중 누구도 법을 어겨가면서 시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 시민들도 그것을 눈감지 말고 오히려 학생들을 준열히 꾸짖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운동의 목적이 진정으로 우리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많은 보통사람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학생운동은 일반국민의 지지를 얻을 것이다.
완전평등사회는 공정하지 않은 사회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던 청년시절에 내가 그렸던 이상적인 사회는 모두가 완벽하게 평등한 사회였다. 잘 사는 사람도 없고 못사는 사람도 없으며,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농민이건 노동자건 아니면 기업의 책임자건 간에 모두가 자유롭게 일하고 똑같이 나눠 갖는 그런 사회가 내가 꿈꾸던 이상사회였다.
하지만 경실련을 시작할 때 내가 갖고 있었던 생각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는 공정하지 않은 사회다’라는 인식이었다. 나는 오히려 ‘일한 만큼 대접받는 사회’가 더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더 많이 대접받고,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은 대접을 덜 받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경실련이 민중운동권의 변혁론과 명확하게 선을 긋고 보통시민들의 운동을 천명한 것과도 궤를 같이 한다.
물론 지금 우리사회에서 노동,농민,빈민운동 등 민중운동은 꼭 필요한 운동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사들의 운동, 변호사들의 운동, 의사, 약사, 한의사들, 말하자면 다양한 직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단체와 운동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우리가 과거 민중운동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이유는 민중의 이익이 절대적으로 억압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민주화과정에 들어서게 되면 모든 사람들은 각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가 주어 진다.
그러면 우리사회에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가 생기게 된다. 예컨대 노동자들과 기업주가 부딪치고, 소비자와 상인이 부딪치며, 세입자와 가옥주, 양사와 한의사가 부딪친다.
따라서 과거에는 운동세력의 형태를 크게 ‘민중운동’, ‘중산층 부르조아운동’, 그리고 ‘기득권세력의 저항’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민주화과정 이후부터는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운동’과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운동’, 이 두가지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위 민중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조차도 교사, 약사, 한의사, 의사, 간호사 등 각 직종을 대표하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세력으로 바뀌어 버린다. 여기서 내가 노동자나 농민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세력이라고 말한 것은 노동자나 농민을 폄하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는 오히려 노동자와 농민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단체를 만들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전진이고 오랜 민주화 과정에서 달성한 값진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민중계급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이해관계를 분출시키는 운동에 나서게 되면 도대체 어느 집단의 이해관계가 사회적 공공선이냐, 어느 집단의 목소리가 옳으냐가 사람들의 주요한 관심사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열심히 연구하고 조사해서 사회적 공공선(公共善)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그것을 주장하는 운동이 등장해야 하고, 이런 운동이 등장할 때 사람들은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길거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데모를 했느냐가 중요했다. 예를 들면 노동자가 몇만명이 모였다느니 농민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서 데모를 했다느니 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보다 사회적 공신력을 가진 단체가 뭐라고 발언하느냐,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뉴스가 되었다. 왜냐하면 국민의 관심사는 어느편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7년 이후 우리사회에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이점 때문에 경실련은 옳은 목소리, 공정한 입장을 갖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이를 테면 노동자, 농민의 목소리라고 무조건 지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고수했다.
한번은 누가 나를 찾아와 ‘경실련이 전노협 후원회에 가입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반대를 했다. 왜냐하면 전노협이 어떤 입장을 취한다고 우리도 무조건 그 입장을 따라가는 방식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면 노동자가 진짜 억울할 때 노동자의 편을 들어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 이런 경험도 있다. 한번은 농민들이 경실련에 찾아와 한국도로공사에서 고속도로를 놓는데 그게 마을 한가운데로 지나가는 탓에 마을이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고 호소를 해왔다. 당시 농민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으니 경실련이 도와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래서 내가 ‘돕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상황 조사부터 해야 합니다’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도로건설계획 분야의 전문가를 수소문해서 H대학의 모교수가 전문가라는 사실을 알아 내곤 그 전문가가 정의롭고 개혁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도 파악했다. 그리고 그 분이 매우 심성이 바르고 곧고 훌륭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에게 농민들의 상황을 조사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그 분이 현장에 내려가 농민들을 만나고 도로공사측의 얘기도 들었는데, 그 결과 도로공사가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었으나 계획을 세울 당시 지역농민의 사전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기획해서 밀어 붙이다 보니 빚어진 일이었음을 알게되었다. 말하자면 도로공사의 명백한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농민들 주장대로 하자면 지질검사도 다시 하고 계획도 다시 세워야 하므로 고속도로의 완공이 1년이 늦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자면 거의 오백억원 이상의 국고를 낭비해야만 했다.
또 한편 ‘농민들의 반대가 왜 거세냐’를 조사했더니 그 이유는 도로가 나면 그 지역 땅값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농민들도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 때문에 극렬하게 투쟁하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상황에서는 농민들의 편에 서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실련이 이런 입장을 견지한 덕분에 그 문제는 의외로 분규가 빨리 끝나고 말았다. 우리가 편이 되어줄 수 없다고 하자 농민들이 힘이 빠져 스스로 투쟁을 끝내버린 것이다.
이런 사례는 이밖에도 매우 많다. 즉 우리가 노동자나 농민 등의 편에 선 경우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한번은 한국도로공사와 주민이 갈등을 빚다가 양쪽이 경실련에 찾아와 어떤 것이 옳으냐를 규명해 달라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입장을 밝혔고, 이로 인해 주민과 도로공사 사이의 분쟁이 해소된 사례도 있었다.
말하자면 경실련이 어느 특정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사회적공공선이 무엇인가에 입각해 운동을 펴나갔기 때문에 결국엔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운동으로 갈등이 빚어졌을 때 경실련이 사회적공공선을 가늠해주는 잣대역할을 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경실련이 출범할 당시 우리 내부에서는 ‘무엇이 경제정의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열심히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대체로 몇가지 원칙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정의의 핵심은 공정함에 있다. 그리고 공정한 입장이란 특정한 개인이나 어느 한 집단의 입장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타당한 보편적인 입장을 말한다.
그리고 공평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회균등의 제공’,‘생산에 대한 기여도에 비례한 차등분배’, ‘절대빈곤의 추방’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내린 경제정의에 대한 그림이었다.
예컨대 남녀의 차별, 노인과 젊은이에 대한 차별, 도시민과 농민의 차별이 없이 적어도 경쟁의 출발선상은 모두가 동일하고,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을 수 있고, 사회보장제도를 갖추어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받는, 그런 사회가 경제정의가 실현된 사회라고 본 것이다.
변혁론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다. 완벽한 평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혁명은 사람들에게 근로의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해 경제의 낙후로 이어진다.
따라서 가장 가난한 사람과 가장 부자인 사람의 차이를 최소한으로 줄이되 일할 의욕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격차는 남겨 놓는, 그런 사회가 사실상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현존 사회주의권의 혼란과 몰락, 그리고 낙후된 경제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또 하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도 모든 사람들이 평등해지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사회주의 국가는 노동자계급의 1당독재사회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없고, 그 때문에 반드시 특권계층이 생긴다.
경실련이 초창기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에 기초하되, 다만 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의 양극화현상을 정부가 개입해서 시정해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추구하는 목표를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약 분쟁의 교훈
93년 여름 우리 국민들은 연일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메우는 한의사들과 약사들의 한약조제권을 둘러싼 분쟁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노태우대통령 말기에 있었던 ‘약사법 시행규칙 제11조 제1항 7호’의 개정에서 불거져 나온 이 분쟁은 93년 3월 한의대생 수업거부로 이어졌고, 그 뒤 한의대생 집단 유급, 전국 약국폐업, 한의사자격증 반납 등으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었다.
한약분쟁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 노골화되지 않았던,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집단간의 갈등이 처음으로 표면화된 것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경실련이 한약분쟁에 휩쓸리게 된 것도 양측의 갈등이 노골화되고 국민들의 걱정이 깊어가던 즈음이었다. 5월경 한의사들이 경실련을 찾아와 정의실현의 차원에서 이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분쟁이 한의대학생들의 유급사태로까지 이어져 약사와 한의사간의 감정의 골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약사들도 경실련이 이 문제에 개입해달라고 요청해왔다.
따라서 경실련에서도 양측을 초청해 공청회를 개최하고 양측이 비로소 처음 자리를 함께 하고 토론에 임했다.
그리고 경실련에서는 공청회에서 파악한 논의를 토대로 *약사의 한약 임의조제금지 *한방 의약분업실시 *자격있는 약사의 한의사 처방전에 의한 한약조제 *한의사의 처방전 발급 의무화 등을 요구하고 아울러 보사부가 약사법 시행규칙 11조 1항 7호를 원상으로 회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경실련의 견해가 매스콤의 주목을 받게 되자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그래서 결국 7월초 보사부가 약사법을 새로 개정할 것을 천명하게 되었고, ‘약사법개정추진위원회(약칭 약개추)’를 구성해 양측의 의견조정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몇차례 논의에도 불구하고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경실련은 그해 9월 14일 독자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 대안을 토대로 약사측과 한의사측이 다시 협상에 응할 것을 호소했고, 경실련이 중재를 맡을 의향이 있음도 밝혔다. 약사들과 한의사들도 그동안 극한 투쟁을 불사하며 대결하였지만, 여론만 악화되었을 뿐 별로 거둔 성과가 없었던 탓에 9월 15일 경실련에 중재에 응해왔고 이로써 유례없는 시민단체의 분쟁조정이 시작되었다.
우선 양 단체의 회장이 지명한 위원들과 시민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된 한약조제분쟁 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16일 기자회견을 통해 활동를 시작한다는 것을 알렸다.
이 자리에서 조정위는 양측의 이익보다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키며 쌍방이 공존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겠다는 점을 천명하였고 활동기간을 향후 5일간으로 하여 이 기간 중에는 양쪽이 모두 극단적인 행동을 자제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그야말로 ‘과연 무엇이 사회적 공공선이냐’를 둘러싼 회의가 연일 계속되었다. 매일밤 8시부터 12시까지 회의를 계속했고, 회의 이외에도 비공식적인 만남도 계속 가졌다.
무엇보다도 위원들 상호간에 충분한 신뢰가 있어야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모두가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끝에 19일 약사회측이 경실련의 대안을 받아들이겠으니 보사부의 입법예고안 철회를 공동으로 요구하자는 제안을 해옴에 따라 사태가 급진전을 맞았고, 20일 극적인 타결을 맞게 되었다.
이때 양 단체 대표들과 내가 기자회견을 갖고 환하게 웃으면서 서로 악수를 나누던 모습이 각 언론에 큼지막하게 나기도 했는데, 지금 봐도 감회가 새로운 사진이다.
그만큼 그 당시 한약분쟁은 이미 양 당사자간의 문제에서 한걸음 나아가 국민전체의 건강을 위협하고 사회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분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시 시간 관계상 약사회는 대표가 전권을 갖고 합의를 했고, 한의사측은 20일 새벽 긴급이사회를 열어 조정안을 인준받은 뒤 극적타결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 조정안이 이틀 뒤인 22일 약사회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기되어 버린 것이다. 기자회견 뒤 약사회 내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결국 보사부가 10월 8일 한약분쟁 조정위의 조정안의 골격을 수용한 ‘약사법 개정에 대한 정부안’을 확정함으로써 오랜 한약분쟁은 일단락이 되었다.
나는 이 과정에서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운동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우선 한약분쟁의 첫번째 교훈은 과거처럼 실력행사를 통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사회적 공공선을 전면에 내세워 국민의 지지를 획득해야 자신의 이익도 지켜진다는 점이다.
분쟁과정에서 약사들의 폐문사태는 오히려 자충수가 되었고,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결과를 몰고 왔다. 그리고 여의도에서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데모를 하였지만, 이러한 대량동원이 사실상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제는 과거와 같이 길거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데모를 하였는가가 사회적 영향력으로 평가되는 시대가 지나갔으며, 이제는 사회적 공신력을 가진 집단이 오히려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공선을 앞세워 민심을 얻지 않으면 분쟁에서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관철시킬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한약분쟁에서 약사측은 법적인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점에 안주해 ‘한약은 한의사에게’라는 국민여론을 바꾸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공존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없이 자신의 이기적인 이해의 관철에만 집착했다.
반면 한의사측은 종래의 주장을 철회하고 공존의 해결방안을 강구하고 이를 통해 시민단체를 설득하고 애쓰는 등 한결 성숙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결국 합리적이고 성숙한 태도가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한 갈등에서 승리를 가져다 준 셈이다.
한약분쟁의 두번 째 교훈은 공신력 있는 시민단체에 의한 자율적인 조정기능의 가능성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한약분쟁과정에서 경실련은 고비고비마다 국면전환에 영향을 미쳤다.
처음 경실련의 시행규칙 삭제 철회요구가 분위기를 반전시켜 약사법 개정작업이 시작되었고, 경실련의 강력한 반대가 보사부 입법예고안을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또한 경실련의 중재안이 문제해결의 방향을 다시 제시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보사부는 최종안을 마련하는 단계에서 경실련이 반대하지 않는 안을 만들어야 한약분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을 정도다.
이점은 도덕성과 불편부당성을 의심받지 않는 공신력 있는 시민단체가 분쟁조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번째의 교훈은 이제는 이해관계 조정에 있어 힘의 역학관계에 의해 좌우되는 절충식 타협안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보사부가 모든 문제를 근원부터 해결하려 하지 않고 그때 그때 적당히 타협하는 방법을 택해왔기 때문에 약사법 자체가 일관성과 원칙을 잃어 왔으며 바로 그 점이 한약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오히려 한약분쟁을 통해 우리는 분쟁해결의 원칙은 이해당사자 쌍방의 이해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국민의 이익을 실현하는 방안을 추구해야 하며, 국민여론이 중요한 판단기준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약분쟁과정에서 ‘한약은 한의사에게’가 대부분의 국민들이 갖고 있던 생각이었고, 결국 분쟁도 이러한 틀 안에서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곧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운동이어야만 분쟁이 발생했을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약분쟁을 떠올려 보면 회환도 적지 않다. 한약분쟁과 관련해서 경실련이 필요 이상으로 부각된 것도 한편으로 매우 부담스럽기도 했다. 중간에 서게되는 조정역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뒤에 숨어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도 판단이 어려운 질문이었다.
또 경실련은 이 과정에서 약사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중재역이 겪어야 하는 정신적이 고통도 많았다. 우리집 앞에서 한의대생, 약대생들이 진을 치고 나를 기다리기도 했고, 이런 저런 항의전화, 항의방문도 많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실련이 한약분쟁의 중재자로 나서게 된 것이 그동안의 활동을 통해 한쪽의 이익에 편들지 않는 불편부당성, 도덕성 등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뿌듯한 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양심적 지식인의 역할
맨 처음 경실련을 구성할 때 내가 가졌던 고민 가운데 하나가 상임집행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였다.
상집위원들은 경실련의 얼굴일 뿐더러 경실련 사업의 향방을 결정짓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는 개혁적이고 각성된 지식인이 경실련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흔히 사람들은 경실련운동을 보통시민들이 주체인 중간층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경실련운동은 중간층 운동이 아니라 중간층을 향해서 당신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민중운동권에서는 민중주체론이 강조되다 보니 운동의 주체를 정할 때에도 그사람이 민중이냐 아니냐를 따져서 그사람이 민중이면 주체가 되고, 아니면 동맹세력이니 기회주의세력이니 하며 동조세력으로 제쳐져야 했다.
나는 이처럼 민중이 결정권을 갖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민중이 자신들의 계급이기주의를 마음껏 터뜨리더라도 무조건 정의로운 것이 된다. 실제로 그동안 민중들의 계급 이기주의는 당파성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마치 사회적 공공선인 것처럼 인식되곤 했다.
따라서 나는 상집위를 50%는 교수나 변호사 등 각성된 지식인으로, 나머지 50%는 노동자대표, 주부대표, 학생대표, 청년대표, 중소기업인대표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들로 구성하고, 각성된 지식인을 경실련 운동의 가장 중요한 주체로 삼았다.
여기서 재야운동권과 운동론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나는데, 이런 운동론을 택하게 된 이유에는 기사연 시절의 경험도 한 몫을 담당했다.
나는 기사연 시절 소위 민주집중제로 불리우는 결정방식에 솔직히 질려 버렸다. 직원들 누구나가 똑같이 연구원의 중요사업에 자기 의견을 반영시킬 수 있도록 하겠다는 본래 의도야 그렇다 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사업결정 권한을 갖다 보니 그야말로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추진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개혁성향의 각성된 지식인을 경실련의 중요한 주체로 삼은 것은 또 한편으로는 경실련의 중요한 운동 목표가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동안 재야운동은 대안을 모색하는 실사구시적 운동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경제 체제가 잘못되었다는 인식 하에 이것을 뒤집어 엎고 사회주의 사회나 혹은 그에 준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만이 대안이라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기존의 사회경제체제를 좀더 개혁적인 모습으로 고치자는 의견은 대안이 되지 못하고 개량주의로 몰려 비판받곤 했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당시에는 기존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통할 수 있지만 일단 민주화 과정에 들어서고 난 뒤에는 그런 이야기가 더 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이제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가지는 운동만이 국민들의 기대와 주목을 받고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전문가가 더 많이 사회운동에 참여해야만 그 운동도 성공할 수 있다.
경실련은 시작할 때부터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에 부동산투기나 각종 경제적 규제에 대해 대안 제시능력이 있는 전문가들을 더 많이 참여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경제학 분야만 해도 재정학, 세제, 경제력 집중, 금융, 국제경제, 중소기업, 농업, 노사관계 등 각 분야에서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는 비판적 지식인을 적극적으로 접촉해 경실련에 참여 시켰다.
강철규 박사, 이근식 교수, 김태동 교수, 이진순 교수, 박세일 교수, 김성훈 교수, 김완배 교수, 하성규 교수, 장원석 교수, 장오현 교수 등 많은 분들이 그런 범주에 속하는 분들이다. 뿐만 아니라 경실련 출범 뒤에도 많은 학자들이 대안 모색운동이라는 취지에 공감해 경실련의 문을 두드리고 스스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당시 재야운동으로부터 ‘경실련운동은 개량주의 운동이다’,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한데, 조금씩 고쳐나가겠다는 개량적 접근은 잘못되었다’는 식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우리는 ‘그렇다. 오히려 우리는 개량주의 운동이다’라고 정면으로 응답했다. 사회를 개량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나는 경실련 운동의 성공 요인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이 대안 모색의 성격이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정부기관이 경실련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기울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우리가 무조건 목소리를 높여 정부를 비판만하지 않고 어떠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경실련은 초창기 가장 중요하게 관심을 가졌던 부동산 투기문제의 경우에도 부동산 투기 근절을 공격목표로 설정한 뒤 가장 먼저 이를 위한 대안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정부는 토지공개념위원회를 구성해 대안모색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위원회가 제시한 대안은 토지공개념 관련 3법이었다. 토지초과이득세, 토지소유상한제, 개발부담금제 등이 그것이다.
토지소유상한제는 주택용 토지의 경우 소유상한제를 두어 그 이상 소유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고, 개발부담금제는 토지개발로 인해 생긴 과도한 땅값 상승분, 즉 초과이득을 정부가 환수하겠다는 것이며, 토지초과이득세는 땅값이 지나치게 뛴 지역의 경우 정부가 땅값상승분의 일부를 세금으로 거둬들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토초세의 경우 ‘미실현이득’이라고 해서 땅이 팔리지 않아 실제 이익이 나지도 않았는데 땅값만 올랐다고 세금을 내야 하는 위헌적 요소를 안고 있었다.
경실련의 학자들은 이 법안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7월 8일 경실련발기인 대회를 가진 뒤 강철규, 이근식, 김태동, 이진순교수 등을 중심으로 연구위원회를 구성하고 1주일에 한번씩 세미나를 개최해 대안을 만들어 정부에 제시했다.
토지공개념 3법을 따로 만들지 말고 양도소득세와 종합토지세를 강화하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종토세의 세율을 강화해 땅을 소유한 사람의 세금 부담 정도를 높이면 자연히 땅을 팔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고, 양도소득세의 비과세감면조항을 대폭 삭제해 양도소득세를 올리면 땅을 팔아도 이익이 남지 않으므로 땅이 본래의 의도대로 주거와 생산의 목적으로 사용될 뿐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지는 못하게 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땅값이 떨어지게 되고 정부가 땅에 대한 세금비중을 높여 벌어들인 돈으로 다시 땅을 싼 값에 사들여 국유지와 공유지의 비율을 높이고 거기에 영구임대주택을 지어 서민들에게 싼값에 나누어주면 우리나라도 고질적인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경실련이 제시한 대안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종합토지세를 강화하고 양도소득세의 비과세감면조항을 축소하는가였다. 사실 정부가 대안으로 선택한 토지공개념 관련 3법은 부동산 투기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바른 길을 버젓이 놔두고, 엉뚱하게 다른 길을 선택해 온갖 문제를 일으키면서 해결을 모색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지소유상한제도를 투기억제책으로 제시했지만, 땅이 많으면 그만큼 세금도 많이 내게 하면 얼마든지 조정이 되므로 구태여 상한제로 묶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런 여러가지 점에서 우리는 정부의 대안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다 보니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만약 경실련이 토지공개념관렴3법을 올바른 대안이 아니라고 반대하면 결과적으로 토지공개념을 반대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고민 끝에 우리는 실제 목표는 종합토지세를 강화하고 양도소득세 비과세감면조항을 철폐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토지공개념 관련법 자체에 대해서도 지지하는, 즉 토지공개념관련 3법도 일정한 효과가 있음을 인정하는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토지공개념관련법들이 정부가 발의해 국회토의를 거치는 동안 상당히 후퇴하게 되었다. 땅 가진 자들의 막강한 로비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실련은 토지공개념을 강화시켜 입법하라는 캠페인을 또 다시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대안모색운동을 하다 보면 이런 딜레마를 곳곳에서 겪게 된다. 예컨대 정부의 대안이 불완전하고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효과를 발휘할 때 그것을 지지할 것이냐, 반대할 것이냐의 딜레마가 대개 우리를 고민에 빠뜨린다.
실제로 경실련이 문제점을 지적하고서도 부분적으로 그 입법효과를 인정했던 토지초과이득세는 나중에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아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예를 들면 공한지에 세금을 많이 매기니까 유휴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엄청난 토초세를 피하기 위해 열심히 빌딩을 짓게 되어 건설현장의 노임단가가 몇배씩 뛰고, 레미콘 파동이 생기고, 서울에 사무용 빌딩이 넘쳐서 수많은 사무실이 텅텅 비게 되는 부작용이 낳았다.
일부에서는 경실련이 그런 토초세를 지지했고, 그래서 그런 부작용이 일어났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사실 우리도 토초세에 대해서 대단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었다. 실제로 토초세가 위헌판결을 받아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을 때 경실련은 토초세의 폐지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다만 조건부 찬성이었는데, 우리가 내건 전제 조건은 과표를 현실화해서 종합토지세를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양도소득세의 비과세감면조항을 폐지 또는 축소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경실련 입장에 대해 일부에서는 ‘상당히 의외다, 왜 토초세 폐지에 경실련이 찬성하느냐’고 말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사실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토초세는 애초부터 올바른 법이 아니다. 왜냐면 미실현 이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처럼 대안을 제시하는 운동은 그냥 반대만 하는 운동보다 훨씬 힘들고 복잡하다. 토지공개념관련법안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닌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경실련은 출범 이후 지금까지 항상 모든 문제를 바라볼 때,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를 먼저 고민하였고, 경실련이 명실공히 대안을 제시하는 신뢰할 수 있는 단체가 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 바로 전문가적 식견을 가진 양심적인 지식인들이었다.
‘경실련 때문에 전세값이 올랐어요’
경실련에 초기 전세값과 월세가 너무 올라 40대 가장이 전세값을 마련못해 자살한 사실이 신문 사회면을 메꾼 적이 있다. 뜻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아파하며 그런 현상을 개탄스럽게 바라보았지만, 부동산 투기 바람에 덩달아 천정부지로 뛰는 전세값을 잠재울 묘안이 사실상 별로 없었던 때이다.
부동산투기근절을 중요한 운동목표로 삼고 있었던 경실련으로서도 서민들을 옥죄는 ‘전세값 폭등’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마련한 대안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전세기한을 2년으로 연장하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임대료를 매년 5%이상 인상되지 않도록 인상을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가지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우리는 외국에서 임대료 인상을 규제하고 있는 사례도 발표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제시한 두 안 가운데 임대료 인상규제는 실현되지 않고 임대기간 연장안만이 실현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까 거꾸로 부작용이 생겨서 전세금 상승분만 오히려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당연히 비난이 쏟아 졌고, 집없는 서민들의 짐을 덜어주려고 했던 우리로서도 무척 곤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뒤 몇해가 흐르면서 전세기간을 2년 연장한 조치가 꽤 정착되어 세입자의 대항력을 높이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나마 그때의 곤혹스러운 마음을 약간은 달랠 수 있었다.
여하튼 이일은 대안모색작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아무리 좋은 대안도 종합대책이 아니면 얼마든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대안모색 작업의 어려움은 이 뿐만이 아니다. 어떤 경우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종합토지세율을 높여야겠다고 대안을 세운 뒤에도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 높여야 하는 것인지를 알려면 정확한 통계수치가 있어야 하는데, 정부는이런 정보를 거의 공개하지 않는다.
특히 종토세의 경우 세율을 인상하면 결과적으로 중산층의 세금부담을 높이게 되어 조세저항의 부작용을 빚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98%의 국민들에게는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나머지 2%의 대토지소유 계층에게만 집중적인 부담이 주는 구체적이고 정교한 대안이 필요했는데, 정보의 부족으로 사실상 그처럼 정교한 대안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원칙적인 면에서 커다란 방향만 제시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외에도 구체적인 대안이 없어 침묵을 지켜야 하는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영종도에 신공항을 세우는 문제를 두고 많은 환경단체들이 공해를 일으키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철새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반대운동을 폈다. 하지만 경실련은 영종도 신공항건설 반대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갈수록 늘어나는 항공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항 건설은 피할 수 없는 일인데, 영종도가 아니면 어디에 신공항을 세울 수 있는가에 대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종도 신공항 건설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오산비행장의 미군기지를 인수받아 그곳에 공항을 세우면 된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오산비행장에 가서 조사해본 결과로는 그곳은 공항 활주로를 늘이는 일이 어려울 뿐더러소음공해로 인해 주변 민가에 엄청난 폐를 끼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판단하기에 오산비행장을 확대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우리로서는 영종도 신공항 반대운동을 펴고 있는 환경단체들의 입장에 무조건 동조할 수 없었다.
핵발전소 문제에 대해서도 경실련은 그동안 침묵을 지켜 왔다. 대부분의 환경단체들이 원자력발전소 건설과 핵폐기물 저장시설 건설을 반대해 왔는데, 우리는 핵폐기물 저장소 건설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저장소를 만들지 않으면 핵폐기물을 그냥 쌓아두는 셈인데, 만약 이게 넘쳐서 더 이상 쌓아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차피 저장소는 만들어야 하므로 지역주민에게 피해가 적고 최대한의 보상이 이뤄지며 안정성이 확보되는 방식이 찾아지지 않으면 안된다. 다만 경실련이 굴업도의 핵폐기물 저장시설을 반대했던 것은 안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따름이다.
원자력 발전소 문제도 원자력 발전소가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전력수요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데 무조건 발전소 건설을 반대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 절약운동과 대체에너지 개발을 통해 전력수요를 줄이는 일이다.
이처럼 공정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다가 아무래도 그것이 찾아지지 않으면 우리는 차라리 침묵을 지켰다. 다른 단체와 연대활동을 하거나 어떤 이슈를 놓고 함께 논의할 때도 주장이 합리적이지 않고 지나칠 경우 연대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언하는 길을 택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공신력을 쌓을 수 있고 정부당국에 대한 영향력도 높여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바른 대안을 찾다가 경실련 내부에서 견해가 엇갈릴 때에도 침묵을 지켰다. 주로 노사문제가 터졌을 때 그런 경우가 많았다.
노사문제의 경우 대개 어느 한편만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기보다는 노동자나 기업주나 약간의 잘못을 갖게 마련이어서 이들 사이의 잘잘못을 명확하게 따져서 해결책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일단 노사분규가 터지면 결과적으로 어느 편을 드는 일을 하기는 정말 어렵다.
또 대체로 노사분규가 일어나면 경실련 내부에서도 상대적으로 노동자 편을 드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기업주 편에 서는 학자도 있다. 따라서 합의된 공동의 결론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엔 아예 성명을 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일반인이 볼때 경실련이 성명을 낼만도 한테 왜 침묵을 지키는가하고 의아해할 때가 대개 이런 경우였다.
물론 가끔가다가 무리하게 한쪽 편을 들어 부작용이 날 때도 있었다.
대구경실련이 대구에서 고속전철을 지상화할 것이냐, 지하화할 것이냐를 두고 내부에서 견해가 엇갈렸을 때의 일이다. 대부분의 대구시민들이 지하화를 원했기 때문에 경실련도 지하화를 지지했는데 일부 간부들이 지역이기주의가 아니냐며 상당히 반발을 했다. 일단 이처럼 반발할 때는 침묵했어야 했는데, 결국 한쪽 편에 서는 바람에 대구 경실련에 내분이 생겨 한동안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침묵할 줄 아는 용기’, 그것은 무책임한 열번의 발언보다 정확한 한번의 발언이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실련이 대안 모색운동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던 까닭에 환경운동을 펴나가면서 환경운동연합과 입장의 차이를 보인 적이 꽤 있었다.
환경운동연합은 대안모색보다는 사람들의 경종을 울리는 데 좀더 관심을 기울인 것같고, 반면 우리는 대안모색의 원칙에 입각해서 대안없는 주장은 삼가왔다.
‘과연 대안이 없으면 비판도 하지 않을 것인가’는 앞으로 좀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쌍방울에서 덕유산을 스키장으로 만들어 유니버시아드 동계대회를 유치한다고 나섰던 적이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자연공원이 심각하게 파괴된다.하지만 유니버시아드 동계대회의 한국개최가 결정된 이상 적절한 장소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이럴때 무조건 반대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으면 환경문제에 대한 국민의 의식을 일깨우지 못하게 되므로 또 다른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환경문제처럼 국민의식을 바꾸는 일이 매우 중요한 사안은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해도 비판을 통해 경종이라도 울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때문에 ‘대안을 모색하자’는 경실련의 운동원칙을 지키면서 동시에 대안이 없더라도 경종이라도 울려야 하는 사회적 필요성을 조화롭게 배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그 배합의 기준은 결국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판단할 도리밖에 없다.